인터뷰-라승용 농촌진흥청장
[ 오형주 기자 ]
“조정이 아니라 래프팅을 한다는 자세로 농촌진흥청을 이끌고 싶습니다.”
지난 1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만난 라승용 농촌진흥청장(사진)은 앞으로 농진청을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이냐는 질문에 다소 의외의 대답을 내놨다. 물 위에서 노를 젓는 스포츠인 조정과 래프팅 이야기로 답변을 시작했다. “조정과 래프팅은 노를 젓는 스포츠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게임의 양상은 전혀 다르죠. 조정은 잔잔한 물 위에서 리더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면 다른 팀원들은 정해진 경로에 따라 그저 노를 저으면 됩니다. 반면 래프팅은 험악한 골짜기에서 팀원 각자가 시시각각 변하는 물살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 종목입니다.”
라 청장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변화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다”며 “농진청 임직원 각자가 조정이 아닌 래프팅을 한다는 긴장감을 갖고 업무에 임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변화하는 상황을 따라가기 위해 바깥을 향해 눈과 귀를 여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라 청장은 지난달 17일 문재인 정부의 첫 농진청장으로 발탁됐다. 작년 12월 농진청 차장(1급)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한 뒤 전북대 원예학과 석좌교수로 후학 양성에 나선 지 6개월여 만에 청장으로 농진청에 복귀한 것이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말단 공무원에서 시작해 차관급인 청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농진청에서 식량작물, 원예특작, 축산 등 3개 작목 연구기관은 물론 기초연구기관인 농업과학원을 모두 거친 진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농진청,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야”
지난달 18일 전북혁신도시 농진청에서 열린 라 청장의 취임식은 기존 농진청 기관장 취임식과 달랐다. 그는 25장짜리 발표자료를 화면에 띄우고 프레젠테이션(PT) 방식으로 취임사를 전했다. 농진청에서 청장이 취임사를 PT 방식으로 진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라 청장은 “농진청에서 숱한 기관장 취임식을 지켜보며 늘 이런 형태의 취임식을 생각해 왔다”며 “농진청에서 40년, 바깥에서 6개월간 보고 느낀 것들을 쭉 정리해 직원들과 공유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취임사 자료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것은 우물 안 개구리를 뜻하는 ‘정중지와(井中之蛙)’라는 사자성어였다. 라 청장은 “지난해 농진청 차장에서 물러나 6개월간 바깥에서 보낸 시간은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는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2월 그는 이듬해 정년을 맞아 공로연수가 주어질 예정이었지만 명예퇴직을 택했다. 공직생활을 너무 오래한 만큼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일찍 길을 터주기 위해서였다.
명퇴 후 전북대 석좌교수와 익산시 명예농업시장 등으로 활동하며 바깥의 생생한 목소리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라 청장은 “동료 교수들은 물론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지역 주민 등 다양한 사람이 현직에 있을 때 듣지 못했던 농진청에 대한 ‘쓴소리’를 여과 없이 해줬다”며 “공무원이었을 땐 ‘농진청에 대한 평가가 썩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의아했는데 밖에 나가서 보니 우리가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겠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고 했다.
고졸·말단 한계 뚫고 박사학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라 청장은 김제농고(현 김제농생명마이스터고)를 나왔다. 농부 집안 3남1녀 중 장남인 그는 어려운 집안 형편을 고려해 농고에 진학했다.
그럼에도 대학에 가고 싶다는 꿈은 늘 마음 한쪽에 남아 있었다. 고3 겨울방학 때 라 청장은 농장에 실습을 나가는 대신 김제의 한 독서실에 틀어박혀 뒤늦은 대학입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농촌지도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문득 ‘대학에 가는 대신 공무원이 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듬해인 1976년 농림직 공무원에 합격해 국립부산생사검사소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981년 농진청에 신설된 농약연구소에서 연구직을 맡게 된 것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농약 검사와 보급을 위해 신설된 농약연구소에 고졸 출신은 단 2명에 불과했다. 한 상사는 그에게 “고졸인데 농약 검사를 할 수 있겠느냐”며 원하면 다른 곳으로 보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듬해 라 청장은 바로 방송통신대 농학과에 입학했다. 남다른 대학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업무 특성상 여름철이면 늘 장마를 타고 날아오는 벼멸구를 추적하느라 전국을 헤맸던 그였다. 방송통신대는 여름과 겨울에 출석 수업이 있는데 여름학기마다 출석을 못해 계속 ‘F학점’을 받았다. 학사학위를 받는 데 결국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이유다.
라 청장은 1992년 연구관 승진 시험에 합격해 경기 수원 원예시험장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공직생활 중 줄곧 농약만 파고들었던 그에게 원예는 영 낯설기만 했다. 그는 “원예 용어를 모르다 보니 업무자료 하나를 제대로 만들 수 없었다”며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어 아예 대학원에 진학해 원예에 뿌리를 묻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결국 고려대 대학원에서 원예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축산과학원을 ‘1등 기관’으로 탈바꿈
이후 농진청 연구정책과장, 연구개발국장 등을 맡으며 승승장구하던 라 청장은 2008년 겨울 다시 한 차례 위기를 맞았다. 축산업무 경험이 전무한 그가 국립축산과학원장을 맡게 된 것이다. 당시 축산단체들은 “원예만 아는 사람을 축산에 보내 축산의 자존심을 짓밟았다”며 반발했다.
이에 라 청장은 그야말로 ‘극약 처방’을 택했다. 나이 50이 넘도록 ‘나씨’로 살던 그가 하루아침에 ‘라씨’로 성씨를 바꾼 것이다. 축산인들에게는 “제가 그냥 축산과학원에 온 것이 아니다. 축산에 ‘올인’하겠다는 의지와 각오로 성(氏)까지 바꿨다. 축산에 모든 열정을 쏟겠다는 약속을 믿어달라”고 호소했다. 이런 강한 의지에 반대여론은 금방 가라앉았다.
원장 취임 직후 라 청장은 그간 축산과학원이 지향해왔던 연구실적 위주의 양적 팽창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봤다. 축산 현장과 거리가 먼 ‘제자리 뛰기식’ 연구 성과만 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연구성과물을 현장에 적용하는 데 최우선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직원 평가 방식을 양적 평가에서 질적 평가로 바꿨다. 덕분에 이듬해 정부의 책임운영기관 평가에서 전체 1등을 차지해 최우수상인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런 일화를 통해 라 청장이 강조하는 것은 ‘자기최면’이다. 그는 “당시 축산과학원장으로서의 자기최면을 강하게 걸기 위해 ‘나승용’이 ‘라승용’이 되는 방법을 택했다”며 “남들보다 더 많은 열정을 갖고 일하기 위해선 이런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농진청장으로 복귀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임 청장 내정 소식을 접하자마자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라 청장은 “다시 예전처럼 열정을 다 바쳐 일할 수 있는 건강상태를 지녔는지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검진을 받았다”며 “다행히 아무런 이상이 없어 다시금 자기 최면을 확실히 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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