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우월' 폭력시위 침묵에 항의
머크 CEO 제조업일자리위원회 떠나
인텔·언더아머 CEO도 줄사퇴
반이민 행정명령·기후협정 탈퇴
일방적 정책 보조 맞추기 힘들어
'트럼프노믹스' 기대치도 낮아져
[ 뉴욕=김현석 기자 ]
미국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줄줄이 등을 돌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반(反)이민 정책 도입,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 선언에 이어 백인 우월주의자 옹호 논란까지 일으키자 대통령 자문위원직을 사퇴하고 나선 것이다.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은 작년 말 당선되자마자 제조업 부흥 등 정책 아젠다 실행을 위해 각종 자문위원회를 구성한 뒤 수십 명의 CEO를 위원으로 임명했다. 미 기업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리더십이 흔들리자 세제 개편, 인프라 투자, 규제 완화 등 각종 공약에 대한 기대 수위도 낮추고 있다.
◆극우 시위 소극적 대응에 줄사퇴
세계 3위 제약회사 머크의 케네스 프레이저 CEO는 14일(현지시간) ‘개인적 양심의 문제’를 이유로 대통령 직속 제조업일자리위원회 위원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회사 트위터를 통해 “지도자들은 증오와 편견, 집단적 우월주의 표현을 단호히 거부해 미국의 근본적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주말 미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일어난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폭력집회에 트럼프가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자 물러났다.
제조업일자리위원회는 제조업을 다시 살리자는 취지에서 포드자동차, 월풀, 다우케미컬 등 미국 대표 제조기업 CEO를 초빙해 조직했다. 이 중 프레이저는 유일한 흑인 CEO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프레이저는 바가지 약값을 내릴 시간이 많아질 것”이라며 협박 반, 조롱 반의 트윗을 올렸다. “머크는 약값을 올리고 미국에서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데 선두주자”라며 “일자리를 돌려놓고 약값이나 내리라”고 비난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은 프레이저를 백악관으로 불러 “이 나라 산업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웠다.
같은 위원회 소속이던 케빈 프랭크 언더아머 CEO와 브라이언 크러재니치 인텔 CEO도 이탈에 가세했다. 프랭크 CEO는 “정치가 아니라 혁신과 스포츠에 헌신하겠다”며 사퇴했고, 크러재니치 CEO는 “분열된 정치가 유발하는 심각한 피해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물러난다”고 밝혔다.
지난 6월엔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협정 탈퇴를 선언하자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월트 디즈니의 로버트 아이거 CEO가 대통령경제자문위원회 위원직을 사퇴했다. 1월엔 트럼프 대통령이 반이민 행정명령에 서명한 것에 반발해 트래비스 캘러닉 우버 CEO가 대통령경제자문위원에서 물러났다.
◆트럼프에게 희망 접는 CEO들
트럼프는 일자리 창출과 감세, 규제 완화 등 경제 부흥을 걸고 당선됐다. 기대도 컸다. JP모간 조사에서 CEO의 72%가 트럼프 행정부 출범을 반겼다. 주요 CEO가 자문위에 흔쾌히 응한 이유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엑슨모빌 CEO 출신인 렉스 틸러슨에게 국무장관을 맡기고 골드만삭스 출신 게리 콘을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수장에 임명하는 등 고위직에 기업인을 대거 선임했다.
해마다 미국 예일대에서 CEO포럼을 주최하는 제프리 소넌펠드 경영학과 교수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프레이저 CEO 사퇴 이후 십여 명의 CEO가 트럼프 대통령의 공격에 깜짝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그들을 정말 아프게 했다”고 말했다.
다수 기업은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 반이민 정책 등이 인사관리 및 사업에 걸림돌이 된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의 리더십이 흔들리자 법인세 인하, 인프라 투자 확대에 대한 기대 수준을 낮추고 있다.
회계 컨설팅업체 딜로이트는 경제·기업 전문가 3100명을 대상으로 법인세율을 35%에서 15%로 낮추겠다는 트럼프의 공약 실현 가능성을 조사한 결과 ‘가능하다’는 의견이 5.3%에 불과했다고 8일 발표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