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김정인 지음 / 책과함께 / 408쪽│2만2000원
[ 서화동 기자 ]
경남 진주에 사는 이학찬은 백정 출신 자산가였다. 그는 자녀를 공·사립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했으나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입학 허가를 받아도 나중에 백정 자식임이 알려지면 그만둬야 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백정이라는 신분은 철폐됐지만 사회적 차별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가 40만여 명의 백정 출신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사회적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형평운동에 나선 이유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다. 그런고로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권장하여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기를 바람이 본사(本社)의 주지(主旨)다.”
1923년 4월 진주에서 열린 창립대회에서 선포한 ‘형평사(衡平社) 주지’의 첫머리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인권선언이었다. 형평사는 사원 자격을 백정으로 제한하지 않고 조선인이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했다. 형평사의 인권운동에 언론은 물론 각계가 호응했다. 가장 많았을 땐 전국에 287개 분사와 3만2000여 명의 사원이 참여했을 정도로 확산됐다.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에서 김정인 춘천교육대 교수는 형평운동과 같은 사례들을 통해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까지의 독립운동사를 민주주의라는 시각에서 재구성한다. 자치, 주체, 권리, 사상, 정의, 연대, 해방 등 7가지 주제에 따라 독립운동 관련 인물과 단체, 사건, 운동, 사상을 배치했다.
일제가 주권을 강탈하자 조선인들은 식민권력의 바깥에 임시정부를 만들어 주권자치를 꾀했다.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원리는 민주주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인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명시했다. 또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임시정부가 통치하는 대의제를 표방했고 평등권·자유권·참정권 등 국민의 기본권과 교육·납세·병역의 의무를 규정했다. 임시정부는 다섯 차례 개헌을 시행했는데 1919년 1차 개헌 이후 임시헌법 2조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 인민 전체에 있다’고 규정했다.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조선공산당, 천도교청년당, 한국독립당 등의 정당과 신간회 같은 전국 규모의 합법적 정치결사도 민주주의의 기제로 작동했다. 만주, 미국, 연해주 등으로 떠난 사람들은 이역 땅에서 자발적 결사체를 만들어 평등한 자치공동체를 운영했다.
학생, 노동자, 여성, 청년, 소년 등의 대중운동이 활기를 띠면서 이들이 정치적 주체로 탄생했다. 3·1운동으로 처음 등장한 학생 세력은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까지 일제강점기 대규모 시위운동의 선봉대였다. 저자는 “대중운동의 주체로 탄생한 학생, 노동자, 여성 등이 운동을 통해 익힌 것은 스스로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힘, 즉 민주주의였다”고 설명한다.
권리를 위한 투쟁도 잇따랐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언론운동이었다. 일제는 신문지법과 출판법으로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그러나 지하신문으로 3·1운동의 불을 지폈고, 끊임없이 언론자유운동을 펼쳤다. 형평운동은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한 투쟁이었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이 사상의 대향연을 펼치는 속에서도 민주주의는 독립을 통해 되살려야 하는 대안의 가치로 자리잡았다.
저자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선 저항의 내적 논리는 민주주의였다고 지적한다. 민족주의가 독립을 위한 저항의 기치이자 동력임은 분명하지만 궁극적 지향점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였다는 것. 그는 “지배와 차별에 저항하며 자유와 평등의 기치를 내세운 건 민주주의적 의식과 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며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식민 지배와 민족 차별에 대한 저항이 당연시되지만, 그건 당위가 아니라 민주주의 역사의 산물이었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19세기 이후 한국 근현대사를 ‘민주주의’라는 틀로 재해석하고 있는 ‘민주주의 역사’ 3부작의 2부에 해당한다. 1부는 1801년 공노비 해방부터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까지를 다룬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2015)다. 1948년 이후를 조명하는 3부에서는 미국·반공·민족·근대화·민주화·민중·시민사회 등을 주제로 한국 현대사를 다룰 예정이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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