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우 기자의 골프 카페] 해저드 앞에 선 K골프

입력 2017-08-02 15:55
수정 2017-08-02 15:57
“휴학할까,자퇴를 할까 고민 중이예요.”

여자프로골퍼 A는 요즘 싱숭생숭하다.하루에도 마음이 수십 번 죽끓듯 변한다.

대학 공부를 계속할 것이냐,말것이냐가 화두다.공부와 투어를 병행하는 게 생각보다 훨씬 힘들어서다.두 달 전 그는 중간 고사를 치르느라 정규 투어 연습라운드를 빼먹었다.우승후보로 꼽혔던 그는 예상밖의 부진한 성적을 냈다.코스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는 “예전엔 리포트로 시험을 대체하고,출석도 학교에서 대충 알아서 처리하곤 했는데,지금은 씨알도 안먹혀요.CC-TV에 증거 다 남는다면서 꼭 출석하라고 하고,시험답안지도 필체검증까지 한다며 자필로 써야 한다고 교수님들이 난리”라고 말했다. 손을 놓다시피했던 공부로 밤잠을 설치다보니 골프도, 공부도 어느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정쩡이 운동선수’로 남을까 그는 두렵다고 했다.

여자 골프 유망주인 고교생 B는 올 초 지방의 한 방송통신고등학교로 학기 중 편입했다. 편입하기 전 반 친구들과 ‘쫑파티’를 하던 날 그는 눈이 붓도록 펑펑 울었다.

“골프만 집중적으로 하고 싶은데,체육 특기생도 수업 다듣고,시험도 다 봐야하는 분위기로 완전히 바뀌었어요.수업일수 못맞추면 유급도 된다고 하고,두 가지 다하다간 경쟁이 도저히 안될 것 같아서 결단을 내린 거죠. 친구들이야 또 사귀면 되지만 골프는 지금 안하면 안되는 거라….”

공부. 요즘 학생 골퍼들의 공통 관심사이자 고민거리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뚝 떨어진 상황에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발단은 ‘국정농단 주역’으로 지목된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씨의 편법특혜입학 사건이다. 수업 안듣고,시험 안보고도 멀쩡히 운동한 게 들통났다. ‘K골프 호시절도 이젠 다갔다’는 말까지 나온다.올들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서 11승, 일본(JLPGA)에서 9승이나 합작해낸 ‘K랠리’가 불을 뿜고 있는데도 이런 비관론은 가시지 않는 분위기다.

국가대표 골프 상비군 딸을 둔 한 골프 대디의 말이다. “하루 종일 볼 치고,대충 공부했으니까 세계 1등했지,사실 미국애들처럼 공부할 것 다하고 골프시합 나갔으면 어땠을까? 전 지금같은 해외 투어 싹쓸이는 불가능했을 거라고 봐요.”

딸은 골프를 위해 대학진학 포기를 고민 중이다. 골프에 올인했기 때문이라는 이유 말고도 한국인이 골프에 강한 이유에 대한 해석은 많다. 한 가지에 올인하는 게 ‘초고속 성공’의 지름길임을 확신하는 골프맘,골프대디의 헌신이 플러스 전극이라면, 부모의 희생과 기대를 배신하지 않으려는 어린 골퍼들의 지극한 효심(물론 골프가 그냥 좋아서 했다는 챔프들도 꽤 있다)이 마이너스 전극이 돼 스파크를 튀긴 것(골프학 교수 C씨)이라는 해석이 가장 단순하다. 남자 여자 똑같이 연습했는데 여자가 유독 강한 이유?

좁디좁은 바늘귀에 실을 꿰고 젓가락으로 콩을 집어온 섬세한 손가락 DNA 덕이라는 매력적인 해석도 있지만, ‘인적자원의 집중’이란 이론은 좀 더 그럴듯하다. 축구 야구 배구 농구 씨름 등 다양한 프로 스포츠 종목이 있고,잘만하면 글로벌 스타로 떠오를 기회가 널려 있어 인재들이 인기 종목 순서대로 채워지는 게 남자스포츠 인력 시장이다. 미국도 여자 프로스포츠 시장이 꽤 크다. 하지만 국내 여자 스포츠는 생계수단이 될만한 종목이 많지 않다.선호 1순위가 골프일 수밖에 없다. 체력과 체격, 감각에 두뇌까지 갖춘 최고의 자원이 골프로 몰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다.

외국 선수들은 대개 골프 올인론에 주목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연습량’이다.틈만나면 골프 이외의 라이프를 즐기려 뛰쳐나가는 그들의 눈에 한국 선수는 종종 연습벌레 아니면 골프 머신인 듯하다.LPGA 투어 19승의 베테랑 크리스티 커(미국)가 “한국이 LPGA 대회를 지배하는 것은 한국여자들이 공부 아니면 골프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평한 게 이런 시각의 단적인 예다.

실제 골프로 성공한 한국인 챔프들의 어린시절을 보면 그런 말이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다. ‘하루 14시간 채를 휘두르다보니 아이언에 새겨진 클럽 번호가 다 닳아 없어졌다’는 신화같은 얘기가 흔하다.샌드 웨지가 닳아서 숟가락처럼 변했다는 우스개도 이젠 특별하지 않다.

이런 연습량 뒤에는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뒤를 봐준’ 체육특기생에 대한 한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묵인 또는 배려가 자리잡고 있다. ‘최순실 사태’이후 이런 문화가 갑작스레 종적을 감춘 것이다.그 빈자리를 ‘최저학력제’ 같은 제도가 채웠다. 공부하는 스마트 스포츠맨을 만들자는 취지다.

공부를 좀 더 하자는 얘기라면, K골프의 미래까지 암울하게 보는 건 지나친 과장 아닐까.오히려 골프와 공부를 두루 잘한 한국계 앨리슨 리나 미셸 위(한국명 위성미),리디아 고(한국명 고보경)같은 양수겸장형 K골프 신인류가 더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10년간 골프 유학을 하고 돌아온 한 스포츠유학 컨설턴트는 ‘과장이 아니다’고 말한다.

“미국의 고급 골프 아카데미에는 이미 중국 태국같은 아시아 출신 유학생들이 넘쳐납니다. 특히 중국 학생들이 유학생의 절반을 넘어요.어떤 곳은 80%가 중국인들일 정도고요.우리의 박세리처럼 펑산산 같은 성공신화가 중국에도 퍼진 거죠.이젠 걔네들이 골프에 올인하고 있어요.그 뒤에 중국 정부가 있고요.”

앞으로 5년 정도 후면 ‘코리안 투어’라는 비아냥을 듣는 LPGA 투어가 ‘차이나 투어’가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과연 그렇게 될까.알수 없는 게 골프고 미래다.분명한 건 K골프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해저드에 맞닥뜨렸다는 점이다.공부와 골프,두 토끼를 잡아야만 넘을 수 있는 최고난도의 해저드다. ‘골프에만 올인해 얻은 불공정경쟁의 결과가 K골프’라거나 ‘골프 머신 코리안’이란 ‘반(反) K골프 정서’를 넘어설 수 있느냐도 여기에 달려 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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