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재정 민주주의 구현" 한다지만…나라살림까지 여론에 맡기나

입력 2017-07-31 18:54
국민참여예산제 도입 논란

내년 국민참여예산위 구성…투표로 사업 결정

도로·댐·도서관 건설 등 지역 SOC사업은 제외

'합의 민주주의' 함정 우려
정부 예산규모 크고 복잡…전문성 결여되면 부작용 커
특정집단 의도적 참여로 재원배분 왜곡 가능성
의회와 갈등도 커질 듯


[ 임도원 기자 ] 정부가 국민참여예산제 도입을 추진하는 명분은 ‘재정 민주주의 구현’이다. 예산 편성의 모든 과정에 국민 참여를 보장해 국민을 단순한 재정 수혜자가 아니라 결정권자로 승격하겠다는 취지다. 명분은 그럴싸하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예산 편성 시 주민 참여를 시행하고 있다는 점도 정부는 내세운다.

하지만 국가 예산은 지자체 예산과는 규모가 다르다. 고도의 전문성과 객관성이 더 많이 요구된다. 이런 분야에 수요자를 직접 참여시키면 자칫 선심성 사업만 늘려 ‘포퓰리즘 예산’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예산의 최종 결정권자인 국회와의 갈등 가능성 등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원자력발전 같은 국가 에너지 백년대계(百年大計)를 비전문가로 구성된 ‘시민배심원단’에 맡기는 데 이어 나라 살림에까지 여론을 반영하겠다는 데 대해 일각에선 현 정부가 지나친 ‘절차적 합의 민주주의’ 함정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국민참여예산위 꾸린다지만…

국민참여예산제는 교육, 문화, 복지, 노동 등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예산사업을 대상으로 시행된다. 도로·댐·도서관 건설 등 특정 지역에 해당하는 사업은 원칙적으로 국민참여예산제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게 정부 방침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특정 지역이나 계층을 대상으로 한 예산사업이 제안으로 들어오면 심사 과정에서 걸러지거나 국민참여예산위원회 투표 등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참여예산위는 내년부터 1000여 명의 일반 국민으로 구성된다. 대부분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무작위 방식으로 선정하고 일부는 정부 부처 등에서 추천받을 계획이다. 기존 지자체 주민참여예산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연령 성별 등에 따라 위원을 고루 분포시킨다는 방침이다. 예산사업 결정은 위원회 투표와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이뤄진다.

한 예로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위는 청소년, 장애인, 다문화가족의 참여를 보장하고 연령과 성별을 감안해 위원 300명 이내로 구성하도록 시 조례에 명시돼 있다. 시민들이 제안한 예산사업을 예산위 투표(45%)와 시민 전자투표(45%), 전문 설문기관 선호도 조사(10%)를 최종 합산해서 결정한다.

◆전문성·대표성 부족 우려

재정 전문가들은 국민참여예산제에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우선 국민참여예산위나 설문조사에 참여하는 국민의 전문성 부족을 꼽는다. 주민 참여가 시행되고 있는 지자체 예산은 소규모인 데다 주민 생활과 관련된 사업이 많은 반면 국가 예산은 규모가 크고 영향 분석이 어려운 포괄적인 사업이 많아 편성에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오영민 한국조세재정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참여 국민의 전문성 부족에서 발생하는 현실적 한계 때문에 중앙정부 차원에서의 참여예산제 도입은 어려운 문제”라고 지적했다.

참여하는 국민의 대표성도 문제가 될 소지가 크다. 예산과 관련 있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재원 배분의 왜곡이 생길 우려가 있다. 여당 내 싱크탱크에서조차 이 문제를 우려한다. 김진영 민주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참여예산제가 로비와 청탁의 창구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재정 낭비 초래할 수도

국민의 요구에 따라 선심성 사업을 추진하면 재정 낭비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행정비용 문제도 거론된다. 참여 국민 모집, 회의 소집과 운영, 국민 제안 수렴, 심사, 투표 등 과정에서 과다한 지출이 발생할 것이란 우려다.

국가 재정에 대한 최종 의사결정권을 갖고 있는 의회와의 갈등과 업무 중복 문제도 있다. 서울시가 2012년 주민참여예산제를 통해 채택한 예산 사업 상당수가 시의회에서 전액 삭감되자 시민단체들이 반발하며 시의회 앞에서 비난 성명을 발표하는 등 갈등을 겪기도 했다. 김순은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국민이 필요한 예산사업과 우선순위를 정하더라도 결국에는 국회를 설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임도원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