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가전업계 산증인' 이해민 전 삼성전자 가전부문 대표

입력 2017-07-21 19:52
수정 2017-07-21 23:13
'냉장고 엔진' 컴프레서 독자 개발 삼성 가전제품 국산화 이끌어
모두가 미쳤다 했지만 '악바리 정신'으로 성공했죠

삼성전자가 '삼고초려'
늦깎이 대학 졸업 후 금성사 입사
스카우트 제의 처음엔 거절
2년 뒤 다시 연락와 옮기게 됐죠

'추격자 삼성' 선도자로 바꿔
미래 수요 급증할 것 예상하고
수입 냉장고 컴프레서 국산화 추진
경쟁업체보다 1년 먼저 생산 성공

삼성 최초 미국 법인장 발령
미국서 한국식 가족주의 '패밀리즘' 도입
직원들 '검은 눈' 이방인에 마음 열어
귀국 후 가전부문 대표까지 올라
"손자에게 들려주려 자서전 냈죠"


[ 임근호 기자 ]
올해 희수(喜壽·77세)를 맞은 노(老) 경영자의 기억은 세세하고 정확했다. 어릴 적 친구나 이웃은 물론이고 금성사(현 LG전자)와 삼성전자에서 일할 때 만난 사람, 업체, 도입한 기계 이름이 그의 입에서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지난 20일 경기 성남 호스트웨이 사무실에서 만난 이해민 전 삼성전자 가전부문 대표(사진)는 “삼성전자가 《40년사(史)》를 편찬하기도 했지만 생활가전보다 전자 쪽을 중심으로 다뤄 아쉬움이 있었다”며 “더 늦기 전에 한국 생활가전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호모 딜리전트》(한국경제신문)라는 자서전을 펴냈다. 책 제목은 그의 인생 철학이라는 중국 속담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에서 따왔다.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세상에 어려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의 얘기 속에는 한국 가전산업의 발전사뿐만 아니라 잘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던 우리 부모 세대의 현대사가 담겨 있었다.

럭비를 통해 배운 팀워크

이 전 대표는 일제강점기인 1941년 6월5일 서울 돈암동에서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전차 종점인 삼선교 근처가 집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학교도 못 다닐 뻔했다”고 했다. “우리 가문이 왕족인 이씨 덕흥대원군파 후손이래요. 할아버지가 한학을 오래 공부한 훈장 선생님이셨죠. 매우 보수적이어서 학교 가서 신학문 공부하지 말고 집에서 한자와 한문 공부하라고 고집하셨어요.”

반면 외가는 어머니 형제들이 신식 교육을 받아 군수, 교육감, 학교 교장 등이 여럿 있는 집안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할아버지 밑에 뒀다간 큰일 나겠다 싶어 아버지를 설득해 할아버지가 살던 당시 화성군 남양면 신남리 바닷가의 사기섬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

그렇게 그는 돈암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는데 3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다. 학업은 중단됐다. 처음에는 도망을 못 가 석 달 후 9·28 서울 수복 때까지 인민군 치하에 살았다. 이듬해 1·4후퇴 때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있던 남양으로 피란갔는데 거기서 꼼짝없이 할아버지에게 붙들려 휴전을 하고도 학교에 못 가고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을 배워야 했다. 보다 못한 그의 어머니가 할아버지와 싸워 큰집을 나오면서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었다. 학교를 오래 쉬었기 때문에 2학년을 다시 다녀야 했다.

그는 서울대 사범대학 부속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서울사대부고까지 6년 동안 럭비 선수로 뛰었다. 훗날 삼성전자 각 사업부에 럭비팀을 만들어 정규전을 연 사람이 그다. 이 전 대표는 “팀워크를 키우려는 의도였다”고 설명했다. “럭비 전술 중에는 우리 팀이 불리할 때 내 몸을 던져 팀을 구해내는 ‘세이빙’이라는 게 있습니다. 굴러오는 공에 과감히 몸을 내던져 우리 편 공으로 만드는 겁니다. 또 스크럼을 짜서 통합된 힘을 발휘해야 상대편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는 삼성에 공식적으로 3대 스포츠가 있는데 야구와 골프, 럭비라고 했다. 야구를 통해선 기술, 골프에선 양심, 럭비로는 팀워크를 배우라는 뜻이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가정교사로 일하며 학비를 마련했다. 대학 땐 1년 휴학하고 서울 오류동 광산에서 일하기도 했다. 1969년 2월 그가 인하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할 때 그의 나이는 당시로선 늦은 28세였다.

냉장고용 컴프레서 국산화 이끌어

첫 직장은 금성사 부산공장이었다. 연봉이 더 높았던 정유회사 칼텍스(현 GS칼텍스)에도 붙었지만 기계공학과 출신으로 정유회사에 가면 유지보수 업무밖에는 못할 것이란 걱정이 들었다고 했다.

그가 금성사에서 금형 설계와 생산공정관리를 하며 3년쯤 보냈을 때 삼성전자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왔다. 삼성전자가 1969년 설립돼 새로운 인력이 많이 필요할 때였다. “그때 거절했습니다. 한 회사에 5~6년은 있어야 일을 알 텐데 내가 뭘 도움이 되겠느냐고 했죠.”

그가 금성사에서 5년을 보냈을 때 나중에 삼성전자 회장까지 오른 강진구 삼성전자 상무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그는 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해(1973년) 삼성전자 뉴프로젝트 담당 과장으로 옮겼다. “지금은 과장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임원이 없던 때여서 과장들이 굉장히 힘이 셌어요. 과장들이 경영진과 얼굴 맞대고 회의하고, 인가받고, 은행 자금 끌어오고, 설비 발주하고 다 했죠.”

삼성전자는 1958년 설립된 금성사보다 10여 년 늦었다. 1972년이 돼서야 내수용 흑백 TV를 양산했고, 냉장고와 에어컨, 세탁기는 1974년부터 생산을 시작했다. 이 전 대표가 삼성전자에서 한 일이 바로 가전업체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다. 가장 시급한 일은 ‘냉장고의 엔진’이라 불리는 컴프레서(압축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금성사는 일본 히타치에서, 대한전선은 도시바에서 컴프레서를 수입해 쓰고 있던 때였다.

“당시 한국 냉장고 시장은 연간 10만 대가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컴프레서를 직접 생산하면 연간 50만 대를 생산해야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었죠. 삼성 안에서도 컴프레서 프로젝트를 추진하다 회사를 들어먹겠다는 소리가 나왔어요. ‘이해민이 미쳤다’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있었다. 공장 완공까지 3~5년은 걸리는데, 그때는 냉장고 수요가 크게 늘어 오히려 컴프레서 생산량이 부족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강진구 삼성전자 대표를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삼성에서만 잔뼈가 굵은 부장급 이상 오리지널 삼성맨 한 명을 상사로 내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훗날 삼성중공업 사장이 된 김연수 부장을 필두로 한 부품사업부가 탄생했다. 삼성전자는 1976년 컴프레서 양산에 성공했다. 금성사보다 3년 늦게 시작했지만 생산은 도리어 1년 앞선 결과였다.

미국서 삼성식 ‘패밀리즘’ 경영 주도

1983년 10월 그는 삼성전자 최초의 해외법인인 미국제조법인(SII) 법인장으로 발령받았다. 노모(老母)를 모셔야 해 갈 수 없다고 했지만 이병철 당시 삼성그룹 회장의 특별 명령이었다. 그는 미국에선 한국 스타일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빨리 깨달았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조회 때 사원들에게 한국식으로 일방적으로 지시 사항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실적 등 회사가 돌아가는 상황을 투명하게 알리고, 직원들 질문에 허심탄회하게 답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식 가족주의를 혼합한 ‘패밀리즘’을 도입했다. “인사과장인 탐 디믹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참 난감했어요. 가까운 친지들만 모인 곳에 낯선 동양 사람이 계속 앉아 있으니 모두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았죠. 그래도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계속 참석해 희로애락을 나누니 미국인 직원들도 마음의 문을 여는 게 보이더군요.”

그의 패밀리즘과 열린 소통은 SII에 노조가 만들어지려 할 때 빛을 발했다. 직원들을 만나 얘기를 듣고 토론을 했다. 노조가 있을 때의 장단점, 노조가 없을 때의 장단점을 알려주고 스스로 판단하게 했다. 90% 이상이 노조 결성 반대에 표를 던졌다. “미국인들은 자기 주장을 치열하게 펼치다가도 상대편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 금방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요. 반면 한국에선 자기 주장만 하고, 상대편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죠. 이건 한국 사람들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돌아와 삼성전자 가전부문 대표까지 한 그는 2000년 초 건강이 나빠져 사표를 냈다. 목 디스크로 수술까지 받았다고 한다. 이후 건강을 회복한 그는 현재 아모텍과 한국단자 등 중소기업에 경영자문을 하고, 큰아들 회사인 호스트웨이에서 회장을 맡고 있다. 큰아들이 이한주 호스트웨이 사장, 둘째 아들이 사모펀드(PEF) 어피니티에쿼티파트너스의 이철주 대표다.

자서전을 쓴 또 다른 이유가 손주들에게 할아버지의 삶을 알려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제 인생의 또 다른 철학이 예수가 말한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계속 두드리고 시도하면 길이 열린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 삼성TV로 가전 수출 포문…반도체·휴대폰 성공 신화로 이어져
이해민 전 대표, 한국 가전산업 발전사 《호모 딜리전트》 출간

반도체와 휴대폰이 ‘수출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한국 전자산업의 뿌리는 가전에 있다.

락희화학(현 LG화학)을 경영하던 구인회 LG그룹 창업자는 “우리도 라디오 한번 만들어보자”며 1958년 금성사(현 LG전자)를 세웠다. 금성사는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아니라 진공관식 라디오 ‘A-501’을 1959년 11월15일 출시했지만 밀수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일제 라디오에 비해 음질이 떨어져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 전자산업의 태동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금성사는 1966년 8월 국내 최초의 흑백 TV ‘VD-191’을 생산하는 등 빠르게 기술을 발전시켜나갔다.

1969년 1월13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에 의해 삼성전자공업이 세워졌다. 삼성전자는 후발주자였지만 금세 선두로 치고 나왔다. 1971년 1월 파나마에 수출한 진공관식 TV ‘P-3202’는 한국 전자업체 최초의 TV 수출이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 가전은 일본을 따돌리고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랙라인에 따르면 올 1분기 미국 가전시장에서 삼성전자는 점유율(매출 기준) 19.2%로 1위, LG전자는 15.8%로 2위를 차지했다. 냉장고와 세탁기, 오븐, 전자레인지, 식기세척기 등 주요 가전 점유율을 합산해 순위를 매긴 결과다.

가전산업 발전사를 담은 책 《호모 딜리전트》를 출간한 이해민 전 삼성전자 가전부문 대표는 “생활가전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 확대·발전해나가는 사업”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 반도체와 휴대폰에 비해 가전 사업부가 주목을 못 받고 소속원들이 위축되는 게 안타깝다”며 “가전이 사람들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고 한국 전자산업의 근간이 된 분야인 만큼 자긍심을 지니고 일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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