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소득주도 성장'에 국민연금 동원 공식화…월권 논란

입력 2017-07-18 18:22
'국민연금 공적기금 강화' 4대 쟁점

공공임대·보육시설 '사회책임투자'…치열한 논쟁 불가피
'벤처투자 확대론' 원금손실 위험 커 기금 안정성에 어긋나
주식 의결권 강화…독립성·수익성·지속가능성은 뒷전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국민연금의 공공부문 투자는 미래세대를 위한 투자다. 공적 연기금의 공공·사회적 역할 강화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17일 국회 인사청문회에 제출한 서면 답변 내용이다. 통상 나랏돈(재정)으로 이뤄지는 공공투자에 국민연금 동원이 바람직한가를 물은 김상훈·윤종필 의원의 질의에 대한 답변이었다. 국민연금 주무부처가 복지부라는 점에서 박 후보자 발언은 무게를 갖는다. 그는 “보육, 임대주택 등 공공부문 투자는 출산율과 고용률 제고 효과와 함께 연금의 지속가능성에도 기여할 수 있어 장기적으로 수익률이 높다, 낮다 단정짓기 어렵다고 본다”는 주장도 했다.

박 후보자는 “국민연금에 다수 국민의 노후가 달린 만큼 적자가 우려되는 사업에 정부를 대신하는 투자는 매우 위험하다”는 연금 전문가들의 지적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그의 답변은 돌출 발언도, 혼자만의 생각도 아니었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제시한 방향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앞서 국정기획위도 공공임대주택, 국공립 보육시설을 적시하면서 ‘사회책임 투자’를 강조했다. 지난 6일 위원회가 주최한 ‘소득 주도 성장과 국민연금기금 운용방향 결정 토론회’에서 김진표 위원장 연설을 통해서였다. 이 토론회는 언론에 공개돼 발표나 다름없었다.


이로써 문재인 정부 ‘국민연금 운용 정책’의 큰 줄기는 드러난 셈이다. 국정기획자문위 행사와 박 후보자 답변 등을 정리해보면 국민연금에 대한 현 정부 시각은 크게 네 가지 쟁점적 측면이 주목된다. ‘국민연금이 △공공복지(사회책임) 투자에 미온적이다 △투자 대상이 재벌·대기업에 편중돼 있다 △벤처·창업투자에 적극 나서야 한다 △보유주식 의결권 강화로 재벌기업 경영을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고치겠다는 것이 문재인 정부 국민연금 정책의 골격이 될 전망이다. 다수 전문가가 “국민연금은 정부 쌈짓돈이 아니다”며 ‘5년 정부의 월권’이란 우려를 표시했지만 쉽게 물러설 분위기는 아니다. 복지정책에 국민연금을 동원하겠다는 것과 보유주식 의결권을 강화한다는 것은 이전 정부에서도 종종 시도됐던 일이다.

"공공투자로 출산·고용률 제고"

김 위원장이 ‘사회책임 투자’라고 강조한 공공투자 강화론부터 살펴보자. 공공임대주택과 보육시설 등에 대한 투자 수요는 늘어나는데 재원(세금)이 부족하다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국민연금을 동원해 출산율을 높이면 결국 연금재정에 도움이 되고, 기금 고갈 시점도 늦출 수 있다는 주장이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채권을 국민연금이 인수하는 방식이면 안정성과 수익성까지 보장된다는 낙관론도 함께 나온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기금 규모가 세계 3위 수준이어서 자금 여유도 있다는 게 현 정부의 시각이다.

반대론은 공공투자는 재정으로 해야 하며, 국민 노후자금이 정부의 인기영합용 쌈짓돈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론에 입각해 있다. 지금 납세자 부담을 줄이겠다고 미래세대 부담을 키울 수는 없다는 논리다. 이들 사업은 성격상 정부나 지자체가 적정한 채권 수익률을 장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수익도 안 나는 사업으로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만 가중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전문가들 "정부 쌈짓돈 아니다"

김 위원장은 “국민연금의 주식 투자에서 대형주·재벌기업 비중이 84.3%”라며 유가증권시장의 대형주 비중(77%)보다 높다고 지적했다. 국민연금 자금으로 대기업들이 투자 특혜를 보는 것처럼 언급하면서 ‘재벌기업 편중투자론’을 제기한 것이다. 또 다른 형태의 ‘재벌때리기’가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 배경이다. 하지만 국민연금 주식 투자는 시가총액에 비례해 기계적으로 이뤄진다. 공단 관계자는 “국내주식 투자는 장기투자를 지향하며, 주식시장의 흐름을 추종하는 ‘시장중립적 전략’을 추구할 뿐”이라며 맞대응을 피했다.

이와 맞물린 요구가 ‘벤처투자 확대론’이다. 김 위원장은 “연금을 운용하는 분들이 대한민국의 미래 경제를 책임진다는 인식을 하는 게 중요하다”며 벤처 투자 확대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10년 뒤 재벌이 몇 개나 살아남겠느냐”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벤처기업에 적극 나서라는 요구는 국민연금 운용 원칙 가운데 하나인 안정성과 배치된다. 공단 측은 “벤처투자는 기금 포트폴리오 관리 관점에서 투자 여건 등을 살펴 추진된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놨다. 사회적 투자나 벤처 투자는 원금 손실의 위험이 커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연금 전문가들의 경고도 적지 않다.

‘보유주식 의결권 강화’는 정치권과 노조가 주로 제기해온 해묵은 논란거리다. ‘연금사회주의’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 때부터 논의돼온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 도입이 앞으로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등 주요 기관투자가가 기업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겠다는 게 스튜어드십 코드의 핵심이다. 국민연금기금의 덩치가 커지면서 주식 5% 이상을 보유한 국내 기업은 285곳, 10% 이상 보유한 기업은 76곳에 달한다. 상당수 대기업의 최대 주요 주주가 국민연금인 셈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도 강행할 듯

수익률 제고를 위한 단순 투자 목적의 주식으로 의결권 행사에 나서면 국민연금이 대한민국 전체 상장기업의 지주회사처럼 된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민연금의 원래 취지에 충실해 보유주식을 다른 주주들 의사결정에 비례하는 ‘섀도 보팅(shadow voting·그림자투표)’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배경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대기업 감시·감독 강화를 강조해온 만큼 스튜어드십 코드도 어떻게든 시행할 것이라는 전망이 커지고 있다.

국민연금기금을 호주머니 돈 정도로 여기는 것은 현 정부만도 아니다. 선거 때면 되풀이되는 정치권의 고질병이다. 국민연금으로 청년지원주택을 짓겠다고 한 ‘안철수 공약’이 그런 예다.

기금 고갈 더 빨라질 가능성 커

국민연금이 강조해온 ‘독립성 중립성 효율성 수익성 안정성’ 강화 방안은 제대로 논의도 안 되고 있다. 공단이 본사를 전북 전주로 옮긴 뒤 수백조원의 자산을 운용하는 인력들이 잇따라 이직하면서 전문성까지 흔들리고 있다. 박근혜 정부 때 삼성계열사 간 합병의 주주권 행사와 관련된 의혹 등으로 공단 최고위 간부들이 재판에 회부되면서 후유증까지 겹친 상황이다.

이 와중에 국민연금 고갈시기가 더 앞당겨진다는 무서운 경고만 나오고 있다. 2060년에 고갈된다는 게 정부의 공식 재정추계다. 하지만 국회예산처는 2058년, 납세자연맹은 2051년으로 더 당겨질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정부가 5년마다 하는 재정추계가 내년 상반기로 다가왔다. 독립성·안정성 강화 방안이 시급하다.

국민연금은 사회적 부조 체계다. 법으로 지급이 보장된 공무원연금, 군인연금과는 차원이 다르다. 기금이 고갈됐을 때 정부가 국민연금에 지원할 근거도 없다. 가입자가 2177만 명으로 불어난 국민연금이 지속가능하도록 정부와 국회가 더 적극적인 보호 육성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