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민송(民松) 권영우 박사를 기리며

입력 2017-07-16 18:10
김광림 <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glkim@na.go.kr >


민송(民松) 권영우는 사업가이자 정치인이며 교육자였다. 열네 살 나이에 단신 상경해 신문배달원, 약국 점원, 가정교사 등의 일을 하며 고학했다. 1971년 버스 한 대로 시작한 사업은 대원여객과 경기고속 등 15개사, 5000여 대 규모로 성장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경영혁신 조치를 취했다. 버스 차장(안내양)과 운전기사 전용 기숙사 건립, 조수 제도 폐지, 기사 월급을 부인 계좌에 넣는 직불제도를 시행했다. 월급으로 술 마시고 화투 치는 것을 원천 차단한 것이다. 교통사고와 가정불화의 원인이 ‘삼갈 줄 모르는 데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정계에선 40대 재선 의원으로 건설분과위원장을 지냈지만 3선의 길을 눈앞에 두고 홀연히 떠났다. 더 늦기 전에 학교를 세워 국가 동량을 키워내야 한다는 필생의 꿈을 위해서였다. 세명대를 비롯해 대원대, 성희여고, 세명고, 세명컴퓨터고가 그렇게 탄생했다.

내가 민송 선생을 인생의 사표(師表)로 오래 추억하는 것은 선생의 성공신화보다는 ‘정성과 공경’을 잊지 않았던 성품 때문이다. 고인은 “세상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며 성실은 사람의 불완전한 운명을 극복해준다”는 말을 하곤 했다. 늘 약속시간보다 30분 전에 왔으면서도 “오느라 수고했다”며 상대를 배려했다. ‘정성스럽고 참됨’ 그 자체였다.

젊은이에게는 “무조건 검소하라”고 당부했다. 검소는 단순히 아끼는 것이 아니라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세명대가 있는 충북 제천과 서울을 오르내리며 늘 기차나 버스를 이용했고, 가족의 소망에도 마지막까지 1인 병실을 쓰지 않았다.

1970~80년대 대부분 기업이 ‘창조’ ‘도전’ ‘희생’ ‘고객 제일’ ‘신용과 의리’ 등을 사훈으로 내걸 때 경기고속 사옥에는 ‘듣지 않는 곳에서 삼가며, 보지 않는 곳에서 진실하자’고 씌어 있었다. ‘중용’ 제1장에 나오는 ‘신기독(愼其獨)’의 표현이라 했다. 세명대 교정에도 같은 글귀가 교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많은 세태는 자신은 물론 가정과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남미가 그랬고 남유럽 국가들이 그랬다. 삼가지 않고 앞뒤 가리지 않는 거친 언사는 함께하는 공간을 좁히고 결국 우리 사회를 ‘무간지옥’으로 만들게 된다. 신기독은 이런 세태 속에서 민송이 평생 지켜온 좌우명이었고, 사훈이자 교훈이었다.

이래저래 요즘 민송 권영우 박사가 무척 그립다.

김광림 <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glkim@na.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