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 일제에 저항…용산기지 3분의1로 줄어

입력 2017-07-13 19:21
일본군 용산기지 강제 조성 문건 111년만에 공개

1906년 주민들 강제 이주 시켜
가옥·묘지·전답 숫자 담겨 수용지 둔지미 마을 위치 확인

조선 통신사 일본 갈때 다니던 후암동~서빙고동 옛길도 표시


[ 박상용 기자 ]
서울 용산 미8군기지로 쓰인 일제의 군기지가 마을 주민 저항으로 애초 계획(990만㎡·300만 평)보다 200만 평 가까이 줄어든 사실이 확인됐다. 미군은 1953년부터 이 부지를 ‘용산 미군기지’로 사용해왔다. 식민지배 상황이었음에도 당시 주민들의 목숨 건 저항이 없었다면 미군기지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컸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둔지미 주민 저항…군기지 규모 줄어

용산구는 1906년 일제가 군기지를 조성하기에 앞서 작성한 문건을 13일 공개했다. 용산구 관계자는 “미군 용산기지가 조성되기 이전 상황을 알 수 있는 최초 자료”라며 “미군의 평택 이전이 본격화한 가운데 용산기지의 원형과 역사성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한국의 안보를 지켜주겠다며 군사동맹협약 격인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이후 용산 평양 의주 등 세 곳에 군기지 조성작업을 시작했다.

발굴된 문건에는 군용지 면적과 경계선이 표시된 ‘한국 용산 군용 수용지 명세도’가 9쪽에 걸쳐 실려 있다. 명세도(상세 그림)에는 대촌과 단내촌, 신촌 등 옛 둔지미(용산에 있던 마을 이름) 마을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가 나와 있다.

둔지미 마을 주민들은 일제의 군용지 수용에 집단 저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일제 군기지는 당초 계획한 약 300만 평 규모에서 약 118만 평으로 줄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일본 헌병에 체포되기도 했다. 문건에는 “이렇게 방대한 땅을 군용지로 수용하면 주민들이 반발할 수 있다”는 일제의 문구도 적혀 있다는 게 용산구 설명이다.

공개된 문건에는 1906년 6월부터 1907년 4월까지 둔지미 마을에 대한 강제철거가 이뤄졌음이 기록돼 있다. 둔지미 내 신촌 주민들은 1908년께 모두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이후 해당 지역에는 일본군사령관 관저가 들어섰고, 오늘날 인근에는 미8군 드래곤힐 호텔이 자리하고 있다. 용산구 관계자는 “둔지미 마을엔 인근 서빙고를 오가며 얼음을 나르는 막노동꾼 등 하층민이 주로 살았다”며 “이들 중 상당수가 오늘날 보광동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설명했다.

◆조선통신사가 다닌 옛길도 묘사

문건에 따르면 군기지로 수용한 토지 내 가옥은 기와집과 초가집을 합해 1만4111호다. 분묘가 12만9469기, 전답은 10만7482평으로 기록돼 있다. 명세도에는 후암동~서빙고동 사이 옛길도 그려져 있다. 수백 년간 이용한 길로 도성을 빠져나온 조선통신사도 이 길을 통과해 일본으로 향했다.

용산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으로 이들 기지에는 243만㎡ 규모의 용산공원이 조성된다. 국토교통부의 용산공원정비구역 종합기본계획 변경계획에 따르면 용산공원은 2019~2021년 토양오염 정밀조사·정화 및 기존 건축물 철거 이후 2022년 본격적인 공원 조성에 들어간다. 2024년에 기본적인 조성이 마무리되고 2027년까지 잔여 지역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국토부는 우선 군사기지로 활용되면서 훼손된 지형을 복원하고, 향토수종과 자생종을 심어 공원의 생태적 건강성을 확보할 방침이다. 미군기지 내부 오염도에 따라 토지 오염 정화 기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어 공원 개발 일정이 차질을 빚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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