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고기 문제가 단순해 보이나요?
경제적 개와 정서적 개
경제적 돼지와 정서적 돼지
선택적 절연 그리고 죄책감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질문의 본질
"우린 앞으로 어떻게 다르게 살 것인가"
매년 여름이면 극명히 입장 차를 달리는 주제가 있다. '개고기'다.
지난 9일 서울 광장에선 대규모 개 식용 반대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참여한 30여개 동물보호단체는 "개 식용을 즉각 중단하고 동물의 생명권을 지켜야 한다"고 소리쳤다. 반면 지난 6일 보신각 앞은 한국육견단체협의회의 '개고기 합법화' 요구로 시끄러웠다. 초복(7월 12일)즈음의 개고기 논쟁은 늘 그랬듯 올해도 어김없다.
환경부 '전국 개 농장 수와 사육시설 통계'에 따르면 전국 개 농장은 1만7059개. 사육되는 식용 개는 200만 마리에 달한다. 이들 대부분은 초복 중복 말복, 뙤약볕의 복날들에 소비된다. 2015년 서울시가 일반인 2133명을 대상으로 개고기 식용문화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일 년에 한 번 이상 개고기를 먹는 사람은 41.93%, 먹지 않는 사람은 58.07%였다(이 설문조사엔 냄비에 들어간 귀여운 강아지 사진이 첨부됐다, 위 이미지 참고). 양측 표준오차까지 감안하면 먹는 사람과 안먹는 사람은 반반으로 첨예하다.
개고기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도 반으로 나뉜다. '전통적 문화로 지속되어야 한다'가 37.81%로 가장 많았고, '바뀌어야 할 구시대 문화'가 30.38%로 나타났다. '먹든 말든 관심없다'는 31.8%, 찬-반-중립 여론까지 고만고만하다.
개고기 찬반 진영 입장차는 이미 잘 알려져있다. 먼저 개고기 찬성론자는 현행 축산물위생관리법에 개를 포함하고, 애견과 육견을 구분하자고 주장한다. 식용 개 사육을 직업으로서 인정해달란 얘기다. 직업으로 인정받으면 법적 노동자다. 고로 생존권도 보장된다.
반대론자는 인간처럼 동물도 생존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동물복지 혹은 생명 차원의 생존이다. 개는 반려동물로 규정한다. 먹는 개와 키우는 개가 애시당초 따로 존재하지 않는단 논리다.
개고기 문제는 단순히 개를 먹느냐 마느냐의 논쟁 외 많은 논리적 문제를 떠안고 있다.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지적이 대표적이다.
'그럼 돼지는 왜 먹나' 반려견과 돼지는 왜 다른 대우를 받는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수의과대학의 제임스 서펠 교수는 이를 ‘선택적 절연’이라 설명한다. 여기서 절연이란 동물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을 두는 것이다. 유대감, 친밀감을 갖지 않음을 말한다. 특히 살생을 앞둔 인간에게 절연은 필수다. 생명을 죽인 죄책감을 떠안고 싶은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사육장 돼지에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름을 붙이면, 관계가 생기고, 정이 드는 법이다. 그런 돼지를 때려 잡는 건 인간에겐 죄책감이다. 대신 경제 논리로 돼지를 바라본다. 품종 개량, 사육 환경, 임신과 분만 등 생산성으로 돼지를 대한다. 이런 육돈은 고기가 되기까지 투입비용과 고기로서의 판매비용으로 그 존재가치를 따진다.
식용 개 농가가 개를 바라보는 관점도 이와 같다. 그들 역시 개와 정서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경남에 위치한 도살장에서 일하는 A씨는 개 뿐 아니라 닭, 오리 등을 도축한다. 털을 뽑고, 굽고, 씻기고 제품으로 포장하는 일련의 과정은 기계와 함께 한다. 고기를 찾는 소비자를 위해 도축할 뿐이다.
개고기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냥 일하는 거다”라고 답했다. 직업 노동자이고, 일로서 개를 대할 뿐이다.
절연의 개념으로 보면, 개고기 찬반을 둘러싼 각기 다른 협회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경제 활동으로 바라보는 개와 가족으로 바라보는 개는 하늘과 땅 차이다. 교집합은 없다. 같은 한마리의 개라도 바라보는 시선은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개를 생물학적으로 일반화한 뒤 경제적 육견이거나 정서적 반려견이라고만 양분하니 해법은 나올 수 없다.
최근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는 이 문제를 관통하고 있다.
'옥자는 경제적 돼지인가, 정서적 돼지인가'
영화 속 옥자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탄생한 돼지다. 감독은 옥자를 통해 경제 논리로만 소비되는 육식 문화에 불편함을 드러낸다. 동물을 상품과 이윤의 논리로만 내모는 인간 군상을 조명하며 관객의 죄책감에 불을 지핀다. 경제적 살생에 내몰린 돼지를 필사적으로 구하려는 어린 소녀, 미자는 극단의 죄책감으로 관객을 내몬다. 심지어 형제 자매에게 붙일법한 돌림자 이름을 돼지에게 선물한 '미자' 아니던가.
영화도 '그럼 돼지는 왜 먹나' 문제의 본질로 흔들림없이 나아간다. 흐리지 않고, 분명히 하기 위해 돼지를 선택했다. 옥자가 돼지가 아닌 개, 오리, 닭 그 무슨 동물이라도 영화의 메시지는 같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고기인 삼겹살이 돼지고기라는 사실을 감독은 놓치지 않는다. 옥자 혹은 돼지, 혹은 삼겹살의 추억으로 관객의 죄책감은 극대화한다. 그래서 영화는 채식주의자가 되자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극 중 옥자를 사랑하는 미자도 백숙은 맛있게 먹는 장면이 삽입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의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생명체를 먹으며 살아가는 생명체의 원죄'에 대해 말했다. 우리가 옥자를 보며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원시시대 채집과 수렵으로 살아가던 인류는 동물을 사냥 후 뼈를 묻어주며 죄책감을 덜었다. 서구사회에서는 인간은 생명체 중 가장 높은 자리에 군림함(아리스토텔레스)을 당연시하거나, 동물은 생각과 영혼이 없는 비이성석 존재(데카르트)로 바라보며 죄책감을 털어내기도 했다.
복날을 맞아 마트에 깔린 보양식용 포장된 고기를 보며,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드물다. 무게당 측정된 가격에 눈길이 갈 뿐이다. 우린 이미, 물리적으로 멀어진 살아있는 돼지와의 거리만큼 절연을 진행했다. 앞서 제임스 서펠 교수는 절연의 선택 이유를 죄책감으로 설명했다. 옥자는 잊고 지냈던 본성과도 같은 죄책감을 상기시킨다.
동시에 오늘날 우린 역사상 유래없이 반려동물을 통해 동물과 유대감을 쌓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어느때보다 많은 공장 사육 동물을 먹고 있다. 동시에 일어나는 이 상황을 애써 외면할 뿐이다. 개고기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현시점에 골몰한 이분법적 찬반 싸움은 무의미다. 인간이 과거 자연과 생태계에서 어떻게 생존해왔고, 앞으로는 과거와 얼마나 다르게 살아갈지에 대한 오래되고, 끝나지 않을, 진지한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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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김민성, 연구= 이재근 한경닷컴 기자 rot011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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