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투자 부족이 생산성 침체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실리콘밸리에선 생산성 지표는 구시대 유산으로 간주
빅데이터 등 '정보'가 새로운 투입 요소로 떠오를 듯
오춘호 선임기자·공학박사 ohchoon@hankyung.com
4차 산업혁명, 생산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
스탠리 피셔 미국 중앙은행(Fed) 부의장은 지난 6일 “미국 정부가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각종 인프라에 기업 투자를 이끌어내야 하고 혁신을 유도해야 하며 노동자를 교육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낮은 생산성에 대한 경고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하지만 미국 실리콘밸리는 정반대 시각을 보이고 있다. 정보기술(IT)과 모바일 경제가 포함되지 않는 현재의 생산성 지표를 전혀 믿지 못하겠다며 다른 개념이 필요하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더구나 4차 산업혁명은 생산성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을 태세다. 생산에 주요 투입요소인 노동이나 자본의 개념도 달라질 전망이다.
앞으론 생산성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과연 기존 생산성을 기준으로 경제 활력을 가늠하는 것이 유효한 걸까.
미국의 지난 1분기 생산성은 전년 대비 0.6% 하락했다. 1960년대 연평균 생산성 증가율은 5%대였다. 2000년에서 2007년까지도 연평균 2.6% 증가했다. 하지만 2007년 이후부터 연평균 1.1% 증가에 그치고 있다. 6월의 신규 고용은 22만 명이 넘는다. 10년 전 고용인력보다 10만 명 이상 늘었다. 실업률은 줄고 신규 고용은 증가하는데 생산성은 제자리이거나 오히려 하락세다.
물론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1950~1960년대 세계 경제를 주름잡던 유럽 각국의 생산성도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세계 생산성을 이끌던 중국 역시 최근 들어선 답보 상태다.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모두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잇달아 생산성 위기에 대한 리포트를 내놓고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생산성이 미미한 상태로 지속된다면 지구촌의 삶의 질은 갈수록 하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금융시장과 사회적 안정성이 훼손된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10년 이상 지속되는 생산성 하락
생산성을 하락시키는 요인으로 우선 꼽히는 건 자본 투자의 부족이다. IMF 자료에 따르면 선진국 경제에서 자본 투자는 2015년에 2000년 대비 10% 이상 줄어들었다. 신흥국 경제에서도 자본 투자는 금융위기 이후 계속 줄고 있다.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큰 영향을 끼쳤다.
모든 업종에서 엿보이는 시장 포화도 생산성 하락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세계적 고령화 현상이나 무역 침체, 글로벌 금융위기 등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IMF는 특히 사회 인프라 등에 투자가 활발하지 못해 생산성이 침체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세계적인 혁신의 정체도 생산성 하락의 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이 점을 지적한 경제학자는 로버트 고든이다. 그는 오히려 지금 일어나고 있는 IT와 인터넷 혁명은 에너지와 전기 전화 의료 등 모든 분야에서 급진적 혁신이 일어났던 20세기 초와 견줄 수 없을 만큼 미약하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혁신은 생산성 향상과 전혀 무관하게 전개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다른 급진적 혁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에 따라 장기적(1870~2007년)으로 매년 2% 성장해오던 미국 경제가 앞으로 1% 미만의 성장을 보이면서 침체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일부 기업들은 신기술이 나오면 순식간에 이를 흡수하지만 그렇지 않은 기업이 많은 것도 혁신을 떨어뜨리고 생산성 향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정작 경쟁 기업이 혁신에 뛰어든 뒤에야 움직이는 기업이 많다는 보고도 있다.
오히려 노동 생산성이 좋아지고 있다는 국가가 많이 나온다는 건 생산성 하락에서 그나마 반가운 뉴스가 되고 있다. 파트타임직의 증가 등으로 1인당 노동생산성이 늘어난 까닭이다.
혁신 부족·무역 침체도 원인
하지만 생산성이 전혀 침체되고 있지 않다는 견해도 만만찮다. 특히 IT의 요람인 미국 실리콘밸리는 생산성 하락에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구글이나 테슬라 등 인터넷 기업들은 이미 생산성 개념이 ‘구(舊)경제의 유산’이라고 간주한다. 인터넷이나 모바일에서 얻는 소비자 편익은 간과하고 투입 대비 산출의 비율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글의 경제학자 할 배리언은 “미국은 생산성 문제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생산성 측정 문제를 갖고 있다”고 할 정도다. 많은 경제적 가치를 공짜로 얻을 수 있는 모바일 특성도 무시된다. 실리콘밸리는 노동 인력과도 무관한 IT기업들이 대부분이다. 전통적 생산성은 이들과 먼 개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들 실리콘밸리 사람은 모두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노동을 줄이면서도 소비자들의 편익을 높이는 방향이다. 이들이 지금의 미국 경제를 꾸려 가고 있다. 새로운 생산성의 개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다른 시각 갖는 실리콘밸리
고든처럼 4차 산업혁명에 비관적 시각을 갖는 학자도 있지만, 사물인터넷(IoT)이나 인공지능(AI) 시대의 생산성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전망하는 전문가도 상당수다. 이 시대에선 자본과 노동을 근간으로 하는 생산성 지표에서 노동 생산성은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글로벌 가치사슬에 따른 제조가 본격화되고 국제 분업이 활발해지면 노동의 형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AI는 노동 생산성의 극대화를 보여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아디다스 등은 이미 글로벌 스마트팩토리를 전개해 효과를 얻고 있다. 많은 기기나 설비가 디지털로 연결되고 수집된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공장 운영이 최적화되는 게 스마트팩토리다. 물론 이 팩토리는 노동자 임금에 영향을 주지 않고 생산성이 향상된다는 것이 실험으로 판명됐다.
서구 학계에선 20세기 생산성 개념을 주도한 테일러주의(각 제조 공정을 최적화해 가장 효율적인 생산 공정을 찾는 경영방식) 대신 새로운 경영 방식인 네오테일러주의(Neo-taylorism)를 얘기하는 학자도 있다. 이런 시대에는 오히려 소비자의 기호나 태도가 생산에 직접적인 변수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소비성향이 생산성 변수 될 수도
AI가 현실화되면 지식에 의한 부가가치가 사라져 지식노동자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의견마저 나온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가 그렇게 주창해왔던 지식 노동자들이 이끄는 미래 사회의 기본 패러다임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되더라도 생산성 개념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4차 산업혁명의 성과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공과를 따질 수 없다는 것이다. 신기술이 도입되면 생산성이 오히려 나중에 올라갈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차라리 빅데이터를 포함한 정보를 제3의 투입 요소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춘호 선임기자·공학박사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