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 & 이대리] 제약업계 영업맨의 애환

입력 2017-07-03 19:06
"품절약 가져와라…공항에 가족 데려다 달라…"
'甲옷' 입은 의사 때문에 픽픽 쓰러지는 영업맨

리베이트 수사에 전전긍긍
검찰 압수수색처럼 불시검문 연습
리베이트 의심 증거 지우기 반복
행동지침도 "튀는 짓 하지 말라"

눈치보기가 일상
의사들이 카톡으로 심부름
주말도 잠도 없는 '乙의 인생'
직업에 대한 회의감 커 이직률↑


[ 전예진/김근희/임락근 기자 ] 여름이 왔지만 제약업계는 한겨울이다. 리베이트 칼바람이 불고 있어서다. 지난 5월 국내 제약사 동아ST의 전직 영업본부장 두 명이 의사들에게 33억원의 리베이트를 제공한 혐의로 구속됐고, 지난달 8일에는 다국적 제약사 노바티스가 의사들에게 해외학술대회 참가경비 76억원을 지원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5억원의 과징금을 맞았다. 제약업계는 발칵 뒤집혔다. 겉으로는 “우리 회사는 문제없다”며 태연한 척이지만 속내는 다르다. “이번엔 조용히 지나가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가 하면 “다음 타자가 누가 될지 걱정”이라고 잔뜩 움츠린 곳도 있다. 한 제약사 임원은 “제약사들이 악덕 기업 이미지로 각인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하루하루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리베이트 불똥이 튀지 않을까 가슴 졸여야 하는 제약업계 김과장 이대리의 사연을 들어봤다.


압수수색도 예행연습

지난달 A제약사는 직원들에게 “튀는 짓은 절대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의례적으로 제약사들이 ‘군기 잡기’ 1호 희생양이 된다는 게 업계의 ‘정설’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주요 공약으로 4차 산업혁명을 강조하고 있지만 막상 수혜 업종인 제약바이오업계는 몸사리기에 급급하다. 한 제약업계 임원은 “4차 산업혁명이고 뭐고 요즘은 리베이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며 “까딱하다 검찰 눈에 띄면 죽는다는 걱정에 매일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고 했다.

최순실 사태 이후 제약사 수사가 대폭 강화된 것이 수상쩍다며 ‘정치적인 해석’을 내리는 이들도 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제약사는 털면 털수록 나올 게 많기 때문에 검찰의 ‘실적쌓기용’으로 만만한 대상”이라며 “새 정부가 복지정책을 내놓기 전에 약가 인상을 요구하는 제약사들을 입막음하기 위해서라도 리베이트 사건이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제약사들은 리베이트 근절을 위해 사내 자율준수 프로그램(CP) 강화에 나섰다. B제약사는 요즘 검찰의 압수수색 예행연습에 한창이다. 사내 감사조직(CP팀)이 불시에 들이닥쳐 영업사원들의 컴퓨터를 뒤지고 관련 서류를 압수해간다. 한 제약사 직원은 “CP팀의 불시검문이 언제 있을지 조마조마하다”며 “정기적으로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이나 접속 사이트 기록을 지우는 것도 스트레스”라고 했다.

진화하는 리베이트 관행

제약업계 리베이트에 대한 처벌 강화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제약사도, 의사도, 약사도 아니다. 회사와 고객 모두에 ‘을’인 영업사원이다. 한국 제약산업 구조상 영업사원들이 리베이트 없이 약을 파는 것은 쉽지 않다. 경쟁사와 확연하게 차별화되거나 혁신적인 효능을 가진 신약이라면 제품력만 가지고도 충분히 판매 실적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다국적 제약사의 오리지널약을 복제한 제네릭은 사정이 다르다. 오리지널약의 특허가 풀리면서 쏟아져나온 비슷한 복제약 틈바구니에서 제품을 팔려면 다른 회사와는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

이런 현상은 ‘신종 리베이트’를 낳고 있다. 법망을 피하면서 고객을 유인할 만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일명 노무(勞務)형 리베이트다. C제약사는 영업사원들에게 컴퓨터 자격증을 따도록 권유한다. 병원 행정 업무를 도울 수 있도록 병원 관리 프로그램 사용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D제약사는 의료정보관리사 병원행정사 의료보험사 등을 한데 모아 영업 ‘드림팀’을 꾸려 새로 개원한 개인병원을 공략하고 있다. 최근에는 병원 직원들의 임금이나 고용문제를 해결해주고 병원 경영을 상담해주기 위해 노무사와 재무설계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을 영업사원으로 채용하는 제약사도 있다.

소규모 개인병원에서는 제약사 영업사원들이 병원을 대신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보험 급여가 되는 약제비를 청구해 수천만원을 받아주는 사례도 있다. 영업사원이 고객사에 제공하는 서비스가 ‘전문화’되고 있다는 얘기다. 한 제약사 영업사원은 “작은 동네 병원들은 행정직원이 부족하고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서비스에 대한 반응이 매우 좋다”며 “금품을 직접 제공하지는 않지만 의사와 영업사원이 모두 이익을 보는 ‘윈윈’ 서비스”라고 말했다.

여전한 의사들의 갑질

제약사 영업사원들을 괴롭히는 의사들의 ‘갑(甲)질’은 여전하다. 작년 10월 부산지방검찰청이 공개한 의사와 제약사 영업사원 간의 카카오톡 내용을 보면 이런 사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 대형 병원 과장급 의사는 제약회사 직원에게 오전 6시에 문자를 보내 다음날 해외로 떠나는 자신의 누나를 공항까지 데려다 달라고 요구했고 다른 의사는 품절돼 공급이 끊긴 변비약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영업사원은 의사들의 요구에 따라 이삿짐센터 직원, 흥신소 사설탐정, 판촉물 배포 아르바이트생, 부동산 중개업자로 변신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제약영업은 여전히 이직률이 높은 업종 중 하나”라며 “심부름꾼으로 전락한 제약영업사원들은 직업에 회의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했다. 2010년 11월 리베이트를 제공한 업체뿐만 아니라 받은 의사도 처벌하는 리베이트 쌍벌제가 시행됐지만 의사들에겐 ‘솜방망이’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현재로선 노무 제공과 관련한 리베이트는 영업사원 진술 외엔 적발할 방법이 없다. 선진국에서는 내부 고발자 포상을 강화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전예진/김근희/임락근 기자 ac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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