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입력 2017-07-02 19:36
수정 2017-07-03 16:56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그 어머니에 그 아들(是母是子)’이라고 했던가.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어머니 조마리아(1862~1927)에 대해 사람들은 “범이 범을 낳았다”고 했다. 천주교 세례 전 본명은 조성녀(趙姓女). 아들만큼 당차고 강한 어머니였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직후 일본 헌병대의 무차별 취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중근이는 러·일전쟁 이후로 밤이나 낮이나 말을 하든 일을 하든 오직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생각뿐이었다. 국채보상운동 때도 온 집안에 의연금을 내게 했고, 가내 생활에서도 매사에 정정당당을 모색했던 진실한 애국자였다.”

1910년 2월14일 일제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이토 히로부미가 많은 우리 국민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게 무슨 죄냐”며 “일본 재판소가 외국인 변호사를 거절한 것은 무지의 극치”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아들을 차마 볼 수 없어 면회는 가지 못하고, 뤼순 감옥으로 형을 면회하러 가는 동생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는 “네가 국가를 위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했다. 대의를 위한 기상과 아들을 향한 모정이 눈물겹게 교차하는 일화다. 이는 훗날 ‘안 의사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라는 미담(?)으로 포장돼 전해지기도 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가 “인위적으로 미화하지 않아도 충분히 존경스럽고 감동적”이라고 해도, 그렇게 믿고 싶은 국민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안 의사 순국 이후엔 두 아들과 함께 연해주로 망명했다가 상하이로 옮겨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창립하는 등 평생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독립신문은 1920년 1월30일자에 “안중근 의사의 모친은 거의 쉬는 날 없이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분주하게 뛰었다”고 보도했다.

항일운동 중 일찍 타계한 남편(안태훈)과 아들 3형제(안중근·정근·공근), 손자(안원생·낙생·춘생 등)까지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집안. 그 토양을 가꾸고 씨를 심고 물을 주며 오늘의 역사를 일궈낸 여장부. 1927년 7월15일 66세로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90년이다. 상하이 프랑스조계 만국공묘(萬國公墓)에 묻힌 유해는 도시 개발 와중에 찾을 길이 없게 됐다. 그나마 국가보훈처가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으니 늦게라도 다행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