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과 1차시험에 지역 선발인원 배정
국왕이 행차한 지역서도 직접 인재 뽑아
정조 때엔 소외된 곳서 특별과거 보기도
김문식 < 단국대 교수·사학>
조선시대에 고위공무원이 되려면 과거(科擧)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아도 공무원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상관(堂上官)’이라 불리는 고위직까지 올라가려면 반드시 과거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사대부 집안의 자제들이 모든 일을 제치고 과거 공부에 몰두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과거에는 지역 인재를 배려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다. 문과와 무과 1차 시험에서 지역별로 선발 인원을 배정한 것이다.
과거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것은 문과 대과였으며, 대과의 1차 시험은 전국에 240명의 선발 인원을 배정했다. 이때 성균관에는 50명, 한성부(서울)에는 40명의 인원을 배정했고, 경상도 30명, 충청도와 전라도 각 25명, 경기도 20명, 강원도와 평안도 각 15명, 황해도와 함경도에 각 10명을 배정했다. 성균관 유생은 전국의 소과 합격자 중에서 선발한 인원이므로 지역별 배정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한성부와 전국 8도에 배정한 인원은 해당 지역의 인구 비율을 따져 정한 숫자였다. 대과의 2차 시험에 들어가면 지역별 배정이 없고, 지방에서 선발된 인원도 서울로 올라와 공개경쟁을 했다.
과거에는 부정 시험을 방지하는 장치가 있었다. 가까운 친척이 고시관으로 있는 장소에서는 시험을 치를 수가 없고, 답안지에서 수험생의 이름과 직계 가족을 기록한 앞부분은 채점할 때 분리해 볼 수 없게 했다. 고시관이 채점할 때 수험자의 필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서리가 답안지를 베껴서 쓰는 역서(易書)라는 제도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 출신의 인재 선발이 줄어들자 국왕이 행차한 지역에서 직접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이 나타났다. 조선시대의 국왕들은 경기도 일대에 흩어져 있는 선왕의 왕릉을 찾아 참배하는 일이 많았다. 궁궐을 벗어난 국왕의 행차는 수행 인원이 수천 명에 이르는 대규모 행사였기에 지역 주민에게 여러 가지로 부담을 줬다. 이에 국왕은 현지 주민을 위로하고 포상하는 조치를 내렸으며, 그중 하나가 해당 지역의 유생과 무사를 선발하는 특별 과거를 보이는 일이었다. 국왕이 제릉과 후릉을 방문할 때에는 개성에 있는 만월대와 성균관, 남대문에서 과거를 보였고, 현륭원을 방문할 때에는 수원에 있는 화성 행궁에서 과거를 보였다.
국왕이 행차한 지역에서 치르는 특별 과거는 국왕이 방문한 지역의 인재만 응시할 수 있었고, 시험을 치른 당일에 채점까지 끝내고 합격자를 발표했다. 그런데 여기에도 부정이 있었다. 대상 지역에 거주하지 않는 사람이 응시해 합격한 사례가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특별 과거의 합격자가 결정되면 반드시 그 사람의 거주지를 확인해 해당 지역 출신이 아니면 낙방시켰다.
정조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역의 인재들을 위한 특별 과거를 보이기도 했다. 1792년 도산서원에서는 3000명이 넘는 경상도 유생을 대상으로 한 특별 과거를 보였고 이후 강원도, 제주도, 함경도, 평안도에서도 같은 방식의 과거를 계속 시행했다. 정조는 출제와 채점, 인재 선발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국왕이 직접 관리함으로써 큰 부담을 가졌고 이 때문인지 후대 국왕은 이 제도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 대에 지방에서 치렀던 특별 과거는 지역 주민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공무원과 공공기관의 이력서에 학력, 출신지, 신체조건을 기록하지 않는 ‘블라인드(blind) 채용’을 시행하고, 지방으로 이전된 공공기관에서는 30% 정도에서 지역 인재를 할당해 채용하라고 지시했다. 모두 지역 인재를 배려한 일자리 정책으로 블라인드 채용은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들어 있고 30% 할당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던 제도의 시행을 독려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지시를 조선시대 제도와 비교하면 블라인드 채용은 과거의 부정 시험을 방지하는 장치에 해당하고 지역 인재 할당은 과거의 1차 시험에서 지역별 인원을 배정한 것에 해당한다.
수도권과 지방을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시대적 과제임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지역 인재를 우대하는 정책은 더 늘어나도 좋을 것 같다.
김문식 < 단국대 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