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내린 밀크티 한 잔, 런던의 옛 추억이…

입력 2017-06-15 17:42
수정 2017-06-16 05:32
지갑 털어주는 기자 - 김포 '카페 진정성'


[ 김보라 기자 ] 스무 살 무렵, 영국에서 잠시 살았습니다. 홈스테이 장소로 가게 된 곳은 런던 노팅힐. 머릿속은 온통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의 말랑말랑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노팅힐’로 차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뭔가 꿈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죠.

네, 그렇습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은 늘 다큐라는 걸 곧 깨달았습니다. 저를 반긴 건 그랜트의 ‘살인 미소’를 가진 영국 남자도, 17세기 그림에 등장하는 로맨틱한 방도 아니었습니다. 반지하의 어두운 방, 좁은 복도, 침대와 책상 하나를 겨우 놓을 수 있는 침실, 그리고 오래된 화장실. 처음 집에 도착한 순간 ‘딱 한 달만 있다 도망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생각뿐. 꼬박 1년 반을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그 집에 머문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도 30년 넘게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터키 아저씨 이스마일과 영국 아줌마 프란체스카와의 일상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60대 노부부와 사는 것은 일상의 반복이었습니다. 대부분 학교를 마치고 이른 저녁을 먹고, 가끔 산책을 한 뒤 TV 드라마를 같이 봤습니다. 어떤 날은 하숙생인지 가사 도우미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많은 일을 하기도 했죠. 마당의 잔디를 깎고, 빨래와 청소를 하고, 주말이면 요리도 도왔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마치 그곳이 진짜 내 집이 된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아련해집니다. 프란체스카가 매일 저녁 했던 말도 떠오르지요. “어 커퍼 티(a cup of tea)?”

저의 미각이 기억하는 영국은 ‘홍차’입니다. 매일 아침저녁 홍차와 함께했고, 인사말보다 더 많이 들은 말이 홍차였으며, 홍차에 홍차잎보다 많은 양의 설탕과 우유를 넣는 영국인들을 보고 기겁한 적도 있었습니다. 홍차 마시는 법에 대해 3시간 넘게 싸우는 영국 할머니들을 말려본 적도 있습니다. 홍차에 우유를 넣냐, 우유에 홍차를 넣냐를 갖고 3시간을 싸우다니.

한국에 돌아와 10여 년이 흘렀는데, 홍차를 제대로 마실 곳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몇 달 전 지인으로부터 ‘인생 밀크티’를 찾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경기 김포에 있는 ‘카페 진정성’이라나. 가로수길도, 연남동도 아니고 김포라니. 의심스러웠지만 어느 주말 찾아가 봤습니다.

인생은 뜻하지 않는 일들의 연속이더군요. 스리랑카산 밤바라켈레 홍차잎 100%를 찬 우유에 24시간 냉침 방식으로 내리고, 비정제 설탕만 첨가했다는 그 한 병. 깔끔한 단맛과 부드럽게 쌉싸름한 맛에 눈이 절로 감겼습니다. 더 놀라운 건 주말 낮부터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오후 3시쯤 되면 밀크티는 다 떨어진다고 합니다. 지금이라도 한 병 사들고 런던행 비행기에 오르고 싶네요. 파란 대문이 있는 노팅힐의 반지하 방을 찾아.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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