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빛 해안가 드라이브 …
100년 된 식당서 맛보는 소바 …
동남아·하와이 안 부럽네오키나와 북부 3박4일 꽉 차게 보내기
단돈 14만5000원. 오키나와로 가는 왕복 항공권 값이었다. 지금 클릭하지 않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아서 앞뒤 계획 없이 두 장을 사버렸다고 친구 A는 말했다. 그러고는 내게 다짜고짜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오키나와 가자. 3박4일.” 어릴 적 좋아하던 탐정 소설은 늘 어디선가 날아온 의문의 편지 한 통으로부터 시작됐다. 이 문장을 2017년 대한민국식으로 얘기하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이 여행은 한 장의 저비용항공 티켓으로부터 시작됐다.’
추라우미 수족관에서 만난 고래상어
여행에는 늘 반전이 난무한다. 탐정 소설보다 더할 때도 있다. 비 예보는 있었지만 이토록 퍼부을 줄 몰랐다. 5월은 오키나와의 강우량이 연중 두 번째로 많은 달이다. 이때부터 한 달 내내 장마가 이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 둘째날 폭우가 쏟아졌고, 호텔 수영장은 빗물이 넘쳐서 물바다가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영장이 있는 호텔을 고르느라 고생할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다.
다행히도 오키나와 북부에는 비오는 날 가기 더없이 좋은 곳이 있다. 바로 추라우미 수족관이다. 추라우미 수족관은 얕은 바다에서 깊은 바다까지 오키나와의 해저 생태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3층에서 시작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산호부터 열대어, 심해어까지 740여 종의 바다 생물을 다채롭게 관람할 수 있다.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등장하는 ‘흑조의 바다’다. 너비 35m, 깊이 10m의 거대한 수조 앞에 서면 절로 함성이 터진다. 버스 한 대 크기의 고래상어 암수 한 쌍이 그 안에서 유영하는 모습은 시공간을 초월한 듯 비현실적이었다.
고래상어는 고래일까, 상어일까. 포유류일까, 어류일까. 겉으로 보면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등에 달린 지느러미나 300개가 넘는 이빨, 아가미로 숨을 쉬는 점은 분명 상어인데, 순한 성격이나 섭식 방법은 영락없는 고래다. 고래상어는 물을 한꺼번에 들이켠 뒤 스펀지 같은 막으로 새우를 걸러 먹는다. 학술적으로는 상어,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큰 어류로 분류되지만 결코 명확하게 규정되진 않는다. 고래상어는 번식을 비롯해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인 미지의 존재다.
비세 후쿠기 마을의 복(福) 나무 가로수길
오키나와에서도 일기예보는 틀리라고 있는 것이었다. 셋째날에는 다행히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다에 들어가기에는 서늘해서 스노클링을 포기하고 드라이브 위주로 여행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찾아간 곳은 모토부 반도 끝에 있는 비세마을이었다. 후쿠기(福木) 1000여 그루가 마을길을 따라 울창하게 뻗어 있어 신선한 공기가 가득했다. 길 왼쪽으로 몇 걸음만 나가면 곧바로 에메랄드빛 바다도 펼쳐진다. 후쿠기는 망고스틴 나무의 일종인데, 오키나와에서는 250여 년 전 류큐왕국 시대에 많이 심었다. 식용이 아닌 방풍림답게 이파리가 고무나무처럼 크고 두꺼웠다. 마을 사람들은 이 튼튼한 나무가 풍해를 막고, 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후쿠기다.
관광객이 적은 아침에는 새소리, 빗질하는 소리, 멀리 잔잔한 파도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마을이 조용하다. 오키나와에서는 집집마다 돌이나 도자기로 만든 사자(獅子)를 대문 기둥이나 지붕 위에 올려둔다. 두 마리가 금슬 좋은 부부처럼 늘 함께인데, 입을 벌린 사자는 재운을 벌어들이고, 입을 다문 사자는 재운이 새는 것을 막는다. 각양각색인 사자의 얼굴을 보며 집주인이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는 것도 재미있다.
600년 역사를 간직한 나키진 옛 성터
200년 전만 해도 오키나와는 일본에 속하지 않는 독립 왕국이었다. 15세기 초 오키나와를 통일한 류큐왕국은 1879년 일본에 복속되기 전까지 약 450년간 지속됐다. 당시의 수도가 현재의 나하시 슈리성이다. 슈리성을 포함해 오키나와에 남아 있는 옛 건축물, 성터 7곳이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북부의 나키진 성터는 7개의 옛 건축 유산 중 슈리성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류큐왕국이 들어서기 전 오키나와는 세 명의 왕이 각각 북부, 중부, 남부를 통치하고 있었다. 이들은 방어를 위해 시야가 탁 트인 산 위에 성을 쌓았다. 나키진 성터는 그중 북부를 지배하던 북산왕(北山王)의 성이 있던 자리다. 나키진 성벽은 600년이 지난 지금 봐도 견고하고 높다. 돌문을 지나 완만한 계단을 오르면 한단 높이 솟은 전망 포인트가 나온다. 궁녀들의 방이 있던 우치바루다. 이곳에선 북부의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키나와 바다에는 7가지 에메랄드빛이 있다더니 과장이 아니었다.
성터를 나오면 매표소 주변에 간단한 먹거리들이 있다. 미군의 영향을 받았지만 오키나와 명물로 자리잡은 다코라이스(문어밥), 자색고구마맛과 소금쿠키맛이 인기인 블루실 아이스크림, 장작 대신 산호로 불을 지펴 로스팅한 ‘35커피’가 추천할 만하다.
연인에게 추천하는 고우리 섬
오키나와 북부에서 연인끼리 갈 만한 로맨틱한 장소를 원한다면 고우리 섬으로 차를 몰아보자. 고우리 섬은 둘레 8㎞의 작은 섬이지만 드라이브 코스, 멋진 해변, 전망 좋은 카페까지 커플 여행의 삼박자를 모두 갖췄다. 오키나와에서 가장 긴, 2㎞의 대교로 연결돼 배를 탈 필요도 없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공효진, 조인성이 바다 위를 가로질러 내달리던 길이 바로 고우리 대교다.
고우리 섬의 별명은 사랑의 섬이다. 고우리라는 이름 자체가 사랑을 뜻하는 오키나와 방언 고이에서 왔다. 전설에 따르면 먼 옛날, 하늘에서 최초의 여자와 남자가 내려왔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듀공 한 쌍이 바닷가에서 짝짓기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선악과를 베어 문 아담과 이브처럼, 그들은 여자와 남자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자와 남자는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했고, 사랑의 감정에 눈을 떴다. 그들이 바로 오키나와 민족인 류큐인의 시조다. 오키나와판 아담과 이브가 살았다는 동굴이 고우리 대교에서 멀지 않은 치누구 해변에 남아 있다. 섬 반대편으로 가면 하트 모양의 해식바위가 있는 디누 해변도 있다. 연인들은 바위 앞에서 찍은 인증 사진을 연애부적처럼 간직한다.
오키나와에 훌륭한 전망 포인트가 워낙 많지만 고우리 오션 타워는 꼭 가볼 만하다. 나선형 도로를 따라 4인용 전동차를 타고 올라가는데 마치 놀이기구처럼 재미있다. 해발 82m에 있는 타워 꼭대기는 야외전망대다. 여기 매달린 종을 연인이 함께 울리면 영원한 사랑이 이뤄진다는 속설도 전해 내려온다.
소박하게 즐기는 소바 한 그릇
차를 렌트한 이유 중 하나는 카페를 찾아다니기 위해서였다. 해안가 말고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 깊은 열대 우림 속, 아늑한 분위기의 농가 등 자연과 어우러진 멋진 카페가 많다. 이런 카페들은 대개 찾아가기 어려운 곳에 숨어 있어 렌터카가 필수다.
추라우미 수족관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아열대 카페(Anettai Chaya)는 1순위로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목조 주택과 넓은 정원을 갖췄고, 해먹과 플루메리아꽃, 꿈꾸는 표정의 돌 조각상으로 장식해 동남아 휴양지를 떠올리게 한다. 야외 평상에 앉아 있으면 모토부항, 세소코섬, 멀리 이에섬까지 시원하게 내다보인다.
반대로 깊은 산중에 터를 잡은 카페도 있다. 카페 이차라(Cafe Ichara)는 야에다케 산 중턱에 자리한다. 전통 가옥을 카페로 개조했는데, 웅장한 절벽처럼 빽빽하게 솟은 원시림 한가운데 있다. 방금 전까지 봤던 푸른 바다가 꿈결처럼 느껴질 정도. 인기 메뉴는 사과를 넣은 화덕 피자며, 간단한 디저트와 차를 즐기기에도 좋다.
오키나와 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은 소바다. 오키나와 고유의 소바 맛집이 죽 늘어선 소바가도(そば街道)가 모토부시 도구치항에서 시작돼 84번 국도를 따라 이어진다. 이 중 원조는 창업한 지 100년이 넘은 기시모토 식당. 20명만 앉아도 꽉 차는 이 작은 식당이 오키나와 전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소바 맛집이다. 오키나와 소바는 우리가 흔히 아는 메밀면이 아니다. 약간 두툼하고 납작한 밀가루 국수다. 근처에도 다른 소바집이 많지만 실제 먹어본 결과 맛의 차이가 분명했다.5000원 한 그릇으로 행복감을 느끼고 싶다면 찾아갈 만하다. 오전 11시 문 여는 시간에 맞춰야 줄서지 않고 먹을 수 있다.
트레킹족이라면 '오키나와의 아마존' 얀바루로
추천 여행코스
3박4일 일정이라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필자는 오키나와 북부 중에서도 모토부 반도에 집중했다. 하루는 추라우미 수족관과 해양박공원, 비세마을을 걸어서 둘러보고, 다음날은 나키진 성터와 고우리 대교까지 드라이브하는 코스를 추천한다.
4박5일 정도의 여유 있는 일정이라면 산악 트레킹을 하거나 작은 섬에서 천천히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오키나와의 아마존으로 불리는 얀바루 일대, 독특한 모양 때문에 크루아상이라는 별명이 붙은 민나섬을 추천한다.
오키나와=글·사진 도선미 여행작가 dosunm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