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오명 벗겠다" 공격적 투자
미국 스타트업 41곳에 35억달러 쏟아
삼성 이어 두 번째 '외국인 큰손'
차이나머니 공습 거세지자 첨단기술 유출 우려도 커져
[ 김현석 기자 ]
중국 최대 모바일 메신저 업체인 텐센트가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에 전방위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임, 자율주행자동차, 인공지능(AI), 암 치료 관련 기술 업체는 물론 우주 관광, 소행성 채굴 등 이른바 ‘문샷(moonshot)’ 벤처기업까지 투자 대상이 광범위하다.
텐센트를 포함한 중국 BAT(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의 이니셜을 딴 이름)가 미국의 혁신기술을 싹쓸이하듯 투자하자 미국 내에선 거부감이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에 이어 두 번째 ‘큰손’
텐센트는 사용자가 9억3800만 명에 이르는 모바일 메신저 ‘위챗’을 보유한 회사다. 모바일 결제, 온라인 쇼핑, 택시 예약 등 온갖 서비스를 위챗에 통합하면서 시가총액이 3200억달러(약 357조8000억원)를 웃돈다.
이런 텐센트가 미국 내 스타트업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다. 2011년부터 41개 벤처에 약 35억달러를 투자했다. 이는 테슬라(올 3월 17억8000만달러) 등 상장기업 투자는 뺀 금액이다. 시장조사회사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지난해 텐센트는 미국 벤처시장에서 기업 투자자 중 11위에 올랐다. 4년 전 18위였던 삼성전자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외국인 투자자로 떠올랐다.
텐센트의 투자는 잡식성이다. 널리 알려진 건 게임 ‘클래시 오브 클랜’을 제작한 슈퍼셀, ‘리그 오브 레전드’를 만든 라이엇게임스 등 게임회사 인수를 통해서다. 2013년에는 미국 모바일 메신저(스냅챗) 업체인 스냅에 투자해 올해 스냅 상장 때 큰돈을 벌었다.
텐센트는 기술만 유망하다면 앞뒤를 재지 않고 투자한다. 지난 2월 콘택트렌즈로 ‘증강현실(AR)’을 구현하려는 이노베가에 300만달러를 투자했다. 3월엔 암의 유전적 증거를 찾는 그레일에 투자했지만 정확한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2015년엔 소행성에서 광물을 채굴하겠다는 플래니터리리소시스에 투자했다.
텐센트의 미국법인 최고경영자(CEO) 데이비드 월러스타인은 월스트리트저널에 “국경을 뛰어넘어 큰 그림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회사들을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텐센트보다 덜하지만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회사인 알리바바, 중국 최대 검색엔진 바이두도 적극적이다. 알리바바는 지난 2년간 AR벤처인 매직리프에 7억9550만달러, 전자상거래업체 제트닷컴에 5억달러를 투자했다. 스냅챗, 차량공유업체 리프트, 전자상거래업체 숍러너 등에도 각각 수백만달러를 쏟아부었다. 4월 바이두는 컴퓨터비전 벤처 x퍼셉션을 인수했다. AI, AR 등의 기술 개발을 위한 것이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은 현지 벤처투자가 줄면서 차이나 머니를 반기고 있다. 중국 자본과 협력하면 중국 시장에 쉽게 뛰어들 수 있다는 이점도 노린다.
◆미국 “우리 기술 줄줄 샌다”
투자가 집중되자 미국에선 차이나 머니 견제가 본격화됐다. 올초 알리바바의 자회사 앤트파이낸셜이 핀테크인 머니그램을 인수하려 하자 미국 금융계에선 우려가 나왔다. 안보 위험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인수는 4월에 성공했지만 차이나 머니에 대한 미국의 시각은 한층 따가워졌다.
미 국방부는 3월 내부 보고서에서 “중국 정부가 알리바바 바이두 등을 앞세워 미국 기술 확보를 위한 전략적 투자를 하고 있다”며 “중국의 실리콘밸리 첨단기업 투자를 계속 허용하는 것은 미국의 기술적 우위를 잃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AI, 자율주행차, 가상현실(VR), 로보틱스 등의 기술은 국방에 중요하게 쓰이는데, 중국이 투자를 통해 이들 기술을 습득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뉴욕타임스는 대표적 사례로 바이두의 벨로다인 투자를 꼽았다. 자율주행차 핵심 부품인 ‘라이다(LiDAR)’ 제조회사인 벨로다인은 지난해 바이두 등에서 1억5000만달러에 이르는 투자를 받았다.
중국의 미국 투자는 2015년 ‘중국제조2025’가 발표된 뒤 가속도가 붙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전기차 로봇 해양플랜트 바이오 항공우주장비 등 수많은 첨단산업에서 세계적 수준이 되겠다는 계획이다.
미국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의 로버트 앳킨슨 회장은 1월 미국 의회에서 “중국제조2025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 전략”이라며 “이는 시장을 왜곡시키고, 미국의 기술을 제멋대로 훔치고 넘겨달라고 강제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