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탈퇴 후폭풍…파리기후변화협정 존립 위기
무역 불균형·철강 반덤핑 관세 등 벌써부터 균열 양상
1000억달러 규모 녹색기후기금, 각국 분담 놓고도 이견
"온실가스 감축 노력 계속"…미국 정부, 진화 안간힘
[ 박수진 기자 ]
미국이 빠지더라도 유엔기후변화협약 파리협정을 계획대로 끌고나가겠다던 ‘중국·유럽연합(EU) 동맹’에 벌써부터 균열이 생겼다. 호주에서는 “미국처럼 파리협정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미국의 전격 탈퇴 선언 뒤 파리협정이 존립 기반부터 뿌리째 흔들리는 양상이다.
◆균열하는 지지 진영
월스트리트저널 등은 지난 2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폐막한 중국·EU 정상회의에서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기후변화 관련 공동성명 채택에 실패했다고 보도했다.
양측은 전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파리협정 탈퇴 선언 직후 이를 ‘중대한 실책’이라고 비판하며 협정 준수 의지를 밝혔다. 탄소배출 1위 중국과 3위 EU의 공동성명은 다른 협정 당사국에 강력한 메시지가 될 것으로 기대됐다. 양측은 공동성명 초안까지 마련해 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막판 성명 채택이 무산된 이유는 두 가지로 전해졌다. 우선 양측의 무역 불균형과 중국의 철강 덤핑수출을 둘러싼 ‘골 깊은’ 갈등이 기후변화 관련 합의까지 막았다는 분석이다. EU는 지난해 중국과의 상품교역에서 1744억유로(약 220조원)에 이르는 적자를 냈다. 적자 규모는 매년 늘고 있다.
미국이 탈퇴한 뒤 파리협정을 유지하는 문제를 놓고도 이견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을 포함한 195개국은 2015년 12월 지구온도 상승분을 산업혁명 이전 대비 섭씨 2도 이하로 유지하기 위해 각국이 자발적으로 온실가스 배출에 노력한다는 파리협정을 맺었다.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의 감축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2020년까지 연간 1000억달러의 녹색기후기금(GCF)을 마련하기로 했다. 누가 얼마를 낼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미국은 앞서 2013년 유엔 차원에서 43개국이 103억달러의 종잣돈(초기 부담금)을 마련하자고 한 합의에서 가장 많은 분담금(30억달러)를 내기로 했다. 미국은 이 중 10억달러를 이미 냈지만 나머지는 협정 탈퇴 선언에 따라 분담 의무가 없어졌다.
◆미국에 줄 서는 호주
미국이 빠지면서 협정국들은 당장 누가 돈을 더 낼지가 ‘발등의 불’이 됐다. EU 회원국은 더 내기를 꺼리고, 중국은 지원이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 구도다. 합의 당시 영국은 12억1000만달러, 프랑스는 10억4000만달러, 독일은 10억달러를 내겠다고 했다.
호주 언론들은 미국의 협정 탈퇴 선언 후 보수 연립정부 내 6~7명의 의원이 맬컴 턴불 총리를 향해 협정 탈퇴나 협정에 대한 원점 재검토를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호주는 인구가 2400만 명에 불과하지만 풍부한 석탄자원을 주요 발전연료로 사용해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파리협정을 준수하면 일부 지역에선 급격한 전력가격 상승과 함께 심각한 전력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안 맥도널드 호주 상원의원은 “미국은 탈퇴하고 중국과 인도는 협정에 미온적”이라며 “기후변화와 관련한 모든 의문을 새로 진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생겼다”고 말했다.
◆“온실가스 감축은 하던 대로”
3일 미국 전역에서는 협정 탈퇴에 찬성하는 ‘파리보다 피츠버그’ 집회와 결정에 반대하는 ‘진실을 위한 행진’ 집회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일부에서는 집회 참가자 간 충돌 직전까지 가는 사태도 벌어졌다.
미 정부 당국자들은 후폭풍을 진화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2일 성명을 통해 “미국은 파리협정이 없을 때도 온실가스 감축과 관련한 뛰어난 실적을 보여줬다”며 “앞으로도 이런 노력이 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까지 나섰다. 그는 3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일명 샹그릴라 대화)에서 “(최근 협정 탈퇴 결정이) 우리가 세상에 등을 돌리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4일 CNN에 출연, “기후변화 억제에 관한 미국의 약속이 바뀌는 것은 아니며 더 이상 환경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다”고 말했다.
워싱턴=박수진 특파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