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포식자' 편견에 갇히고 '규제·경쟁'에 치이는 현실…유통업이 박수 받는 세상은 올까요?

입력 2017-06-01 18:37
진화하는 유통산업 <5·끝> 유통업 앞의 숙제들

현장에서

'고용창출 효과' 너도나도 폄하
유통산업 커지면서 일자리 늘려도 '질 좋은 고용 아니다' 곱지 않은 시선
하지만 이마저도 없다면 어떤 현실일까

자영업자 과잉 시대
치킨집 옆 또 치킨집…한집 건너 미용실
같은 업종끼리 경쟁하다 도태되었을 때
이들이 다시 일할 곳은 어디일까

김용준 생활경제부 기자 junyk@hankyung.com


[ 김용준 기자 ]
# 부산 보수동 인근에 롯데마트가 문을 열었다. 입구에는 롯데자이언츠 전설, 고(故) 최동원 선수의 동상이 서 있다. 1층 천장에는 자이언츠를 거쳐간 선수들의 캐리커처가 만국기처럼 날린다. 팬들을 위한 공간도 있다. 다른 쪽으로는 롯데 껌부터 시작해 지난 50년간 롯데가 만들어 판 제품들의 전시공간을 조성했다. 쉼터와 함께. 1층의 유일한 상업공간은 10여 개 식당. 동네 주민들이 자주 다니던 식당이다. 2층은 커피숍과 강의실. 다문화 가정 주부들이 커피를 팔고, 한글을 배운다. 절반은 공동 사무실로 꾸몄다. 부산 경남지역 청년들을 위한 창업센터다. 롯데의 상품 전문가들이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다. 근처 헌책방들도 이곳에 자리 잡았다. 지역 청년들이 개발한 상품은 3층부터 들어선 매장에서 판매한다. 다른 상품도 부산·경남지역 기업들이 만든 공산품과 인근에서 수확한 농수산물이 대부분이다. 직원들은 모두 지역의 형편이 어려운 사람 가운데 뽑았다.

2년 뒤 이 매장은 어려움에 처한다. 적자가 불어났다. 롯데는 문을 닫기로 했다. 안내문을 내걸었다. “고객님 죄송합니다. 경영의 어려움으로 폐점합니다. 부족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롯데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문을 열겠습니다. ‘의미 있는 성공적 매장’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 5회에 걸친 ‘진화하는 유통산업’ 시리즈를 기획하는 순간부터 상상한 일이다. 만약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다음엔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다음날부터 지역 주민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 줄을 서지 않을까. “우리가 살릴끼다 마!”를 외치며.

황당한 상상일까. 아니다. 롯데, 신세계, 현대백화점은 이미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앞선 기사들에 이런 움직임을 담았다. 요약하면 이렇다. ‘아울렛과 복합몰은 관광인프라가 됐고, 유통 3사는 지난 10년간 매년 1만 명 가까운 직원을 늘리며 탁월한 일자리 창출 능력을 보여줬다. 부족하지만 상생의 성공모델을 만들었고, 홈쇼핑은 중소기업 수출을 돕는 제2의 종합상사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기사에 달린 댓글은 험했다. “늘린 고용은 모두 비정규직이다”라는 주장, “얼마 받고 쓰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현실이다. 인식이 현실이라면 한국 유통업의 현실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골목상권 침해, 협력업체에는 갑질, 직원 처우는 개판.’

전문가들은 출발점이 이 지점이라고 말한다. 현실을 인정하고, 사회와 대화를 시작하는 유통 회사의 노력. 이를 통해 유통업을 미래산업, 성장산업, 고용산업으로 육성할 수 있는 논의를 시작할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국회에는 수많은 유통 규제 법안이 올라와 있다. 새 점포 출점을 사실상 원천 봉쇄하는 법안도 있다. 문재인 정부도 각종 규제의 칼을 들이댈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일자리를 제1과제로 표방한 정부라면 뭔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게 있다. 지난 10년간 유통 3사가 만들어낸 일자리는 어떤 업종보다 많았다. 반론도 있다. 이들이 만들어낸 일자리가 질 좋은 일자리냐는 질문이다. 마트에서 계산하는 일이 좋은 일자리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절박한 사람들이 마트가 아니면 달리 갈 곳은 어디일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게 현실이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신세계가 매년 만들어낼 1만 개의 일자리가 좋은 일자리가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유통업 종사자들의 처우를 개선해 서비스업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것은 물론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이를 문제 삼아 고용창출 효과를 부정하는 것도 또 다른 편견이다.

유통업 고용은 또 다른 한국 사회의 숙제와 맞닥뜨린다. 고용과 상생 문제가 모두 얽혀 있는 자영업자 과잉 문제가 그것이다.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문재인 정부가 계승하겠다는 노무현 정부 때 이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됐다. 당시 정부는 높은 자영업자 비율이 사회불안 요소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 비율을 낮추기 위해 미용실 거리제한을 두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건전한 문제의식은 정치적 이슈의 부상과 함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자영업자를 줄여야 한다면, 이들이 갈 곳은 어디일까. 그 대안 가운데 하나가 성장하는 유통업이라는 것을 10년간 고용창출 능력을 통해 기업들이 입증했다. 이런 현실을 제쳐두고, 상인들만을 보호하기 위해 유통업을 규제의 대상만으로 바라보는 것은 사회적 손실임이 명백해 보인다.

# 미국에서는 아마존이 게임의 판을 흔들고 있다. 아마존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력은 전통 오프라인 업체들을 아사상태로 내몰았다. 그 아마존이 국내 진출을 코앞에 두고 있다. 중국 유통산업은 상상하기 어려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중국에 나갔던 유통회사들은 철수를 선언했거나, 철수를 준비 중이다.

이런 시간에 한국은 갑질 논란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유통회사들은 지레 몸을 사리고 있다. 점포 설립 계약을 연기하기도 했다. 소비자들은 선택권을 갖지 못해 불만이다.

이렇게 지낼 시간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때다. 유통기업들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앞에서 얘기했다. 이제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의미를 팔아야 한다. 전문가들은 이를 ‘머니 메이킹(money making)에서 미닝 메이킹(meaning making)으로의 전환’이라고 부른다.

기업들의 노력과 동시에 사회적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 선진국 대부분이 이런 타협의 과정을 거쳐 위기를 극복했다. 갑질과 골목상권이라는 그동안의 프레임을 버리는 게 필요하다. 일자리를 만들고, 관광객을 유치하고, 수출 플랫폼 역할을 하는 ‘사회 인프라’로 유통업을 보기 시작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외국 유통업체를 부러워한다. 이익률 상한선을 정해놓고 좀 더 싸게 물건을 팔아 소비자 이익을 보호하는 코스트코, 자신의 점포에서 팔지 않는 물건도 고객이 교환해달라고 하면 해주는 노드스트롬 백화점, 직원을 ‘신사숙녀를 모시는 신사숙녀’로 모셔 서비스의 상징이 된 리츠칼튼호텔. 한국 유통업에서도 이런 기업이 나올 때가 된 듯하다. 그 출발은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기업 소비자 지역상인 청년들이 서로의 진화를 돕는 파트너로 인식하는 것, 즉 공진화(coevolution)에 대한 인식은 아닐까.

김용준 생활경제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