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에 새 장편소설 '선한 이웃' 출간한 이정명 씨
[ 심성미 기자 ]
“선한 사람도 거대한 국가권력의 권위 아래에서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해 늘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 팩션(역사적 사실에 가공의 이야기를 더한 장르)의 대표주자로 《뿌리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등을 쓴 소설가 이정명(52·사진)이 4년 만에 새 장편 소설을 냈다. 1984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선한 이웃》(은행나무)이다.
이 소설은 운동권의 ‘얼굴 없는 실세’로 지목된 최민석과 그를 쫓는 공작원 김기준, 연극을 통해 불의에 저항하려는 연출가 이태주와 모든 공작의 배후에 서 있는 관리자 등 다섯 인물의 시점으로 격동의 시대를 돌아본다. 소설의 배경을 1980년대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직선제를 쟁취한 지 30년이 흘렀지만 그동안 민주주의를 더 고양하는 데 실패한 것 같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블랙리스트 사태’가 대표적 예죠. 각 개인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항상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습니다. 또다시 30년이 흐른 뒤 같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요.”
소설 속 주요 등장인물 중 처음부터 악한 마음을 품은 것으로 묘사되는 이는 없다. 김기준도 한때는 법으로 정의를 도모하는 법관을 꿈꿨다. 그러나 가족을 빌미로 접근하는 권력의 압박에 시달리다 정보기관 공작원으로 발탁된다. 그는 주어진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한다. ‘빨갱이를 잡고 좌익분자를 색출하는 일은 정치적 신념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144쪽).’ 이 소설은 시스템이 우리 곁의 평범한 사람들을 어떻게 악으로 포섭하고 하수인으로 부렸는지 묘사한다.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주제의식을 공유하기도 한다. 작가는 “개인의 선택 자체를 ‘선과 악’으로 구분짓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며 “다만 선의를 가지고 선택한 결과가 시스템과 결부됐을 때 왜곡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책 후반부에서 이태주와 김기준은 ‘내가 누구인지’를 질문하며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김기준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 “스스로의 결정이 나의 의지를 얼마나 반영한 것인가를 되짚어보려 했어요. 고도로 발달한 산업 사회에서 의도적으로 인간의 경험을 조작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긴다면 인간은 흔들림 없이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습니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은 대개 운동권 인물인 경우가 많았지만 이 책은 정반대다. 이 작가는 “운동권과 대적하는 인물들의 시선에서 글을 쓴다면 조금 다른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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