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상금 없어도…급증하는 교통위반 공익신고
5년 새 10배 넘게 신고
중앙선 침범·끼어들기 등 하루 평균 3000여건 제보
경찰서마다 별도 전담반 설치
차량용 블랙박스가'1등 공신'
경찰 단속 어려운 곳에서도 결정적인 위반 증거 수집
운전자 경각심 높여 사고 예방
[ 황정환 기자 ]
직장인 허모씨(32)는 지난달 대전의 한 사거리에서 정지선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태료 4만원을 내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허씨를 뒤따르던 차량의 운전자가 블랙박스 영상과 함께 경찰에 신고한 것. 담당 경찰서로 가서 영상을 직접 확인해 봤다. 왕복 8차선 도로를 달리던 허씨 차량이 노란 신호등이 켜진 직후 횡단보도 앞 20m 전방에서부터 속도를 줄이다 정지선을 살짝 넘어서는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하지만 비슷하게 달리던 다른 차선의 차량들은 아예 신호를 무시한 채 빠르게 지나갔지만 차량번호 식별이 불가능해 과태료 처분을 피했다. 허씨는 “정지선을 지키지 못한 건 잘못이지만 유일하게 신호에 따른 사람을 굳이 신고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며 “이래서야 수긍할 수 있겠느냐”고 불만을 털어놨다.
차량용 블랙박스와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교통 위반에 대한 공익신고가 매년 크게 늘고 있다. 신고포상제가 2001년 폐지돼 신고자에게 어떠한 보상도 없지만 하루 평균 3000건에 달하는 신고가 접수된다. 주요 경찰서마다 쏟아지는 공익신고 사건 처리에 별도의 전담 요원까지 배치, 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사소한 교통 위반에도 과태료가 부과되면서 과도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감시’라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교통위반 시민 제보 5년 만에 11배↑
26일 경찰청에 따르면 교통위반과 관련한 공익신고는 2011년 9만5744건에서 지난해 109만1320건으로 11.4배로 늘었다. 해마다 20만 건씩 늘어나다 지난해는 43만 건가량 급증한 것으로 집계됐다.
공익신고는 경찰의 폐쇄회로TV(CCTV)나 이동식 카메라 등을 통한 자체 단속과 별개로 일반 시민의 제보를 바탕으로 이뤄진다. 블랙박스나 스마트폰 등에서 수집된 증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단속 항목만 149개에 달한다. 좌·우회전이나 유턴 시 방향 지시등 미점등(22만5417건), 중앙선 침범(7만6200건), 끼어들기(7만4460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5년 새 10배 넘게 공익신고가 폭증한 것은 경찰로서도 예상 밖이다. 공익신고를 아무리 많이 해도 아무런 포상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경찰은 2001년 교통법규 위반 차량을 신고하는 일반 시민에게 건당 3000원씩을 지급하는 ‘신고포상제’를 시행했다가 2년 만에 접었다. 캠코더를 갖고 다니며 하루에만 수백 건씩 신고해 거액의 포상금을 챙겨가는 ‘차파라치’가 활개를 치는 등 부작용이 커서다.
신고 폭증의 요인으로 차량용 블랙박스 대중화가 첫 손에 꼽힌다. 작년 한 해 동안 팔린 차량용 블랙박스는 200만 개로 2012년(50만 개)에 비해 4배 증가했다. 국내에서 판매된 자동차가 국산·외국산을 포함해 총 181만 대란 점을 감안하면 거의 모든 신규 차량에 블랙박스가 설치되는 셈이다. 경찰 관계자는 “과거 교통위반 증거를 수집하려면 해상도 높은 캠코더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최신 블랙박스가 초고화질로 전후방을 모두 촬영하기 때문에 별다른 노력 없이도 충분한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니면 말고’식 신고도 크게 늘어
신고는 폭증하고 있지만 담당 인력은 그대로다 보니 일선 경찰서는 쏟아지는 공익신고 민원 처리로 진땀을 흘리고 있다. 공익신고가 많은 서울 등 주요 도시 경찰서마다 하루에만 수십 건씩 몰려 아예 전담 인력을 둔 곳이 적지 않다.
이런 사정 탓에 행정 실수가 나오기도 한다. 주부 박모씨(57)는 작년 말 경찰로부터 “지시등을 켜지 않고 우회전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는데 경찰서에 출석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경찰서를 찾아가 확인해보니 블랙박스에 찍힌 차량번호가 뒤 네 자리는 같았지만 앞번호가 달랐다. 박씨는 “차종이 다른데도 차량번호만 보고 조치를 취했더라”며 황당해했다. 보복성이나 ‘아니면 말고’식 신고도 많다. 서울 시내 한 경찰서 교통과장은 “몇 번 공익신고로 벌금을 낸 사람들이 보복성 신고를 일삼기도 한다”며 “현장에서 자체적으로 걸러내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교통질서 준수로 자율주행차 시대 대비”
과거 단속이 어려웠던 사각지대가 크게 줄어들고 운전자들의 경각심이 높아진 것은 긍정적이다. 택시 운전사 최모씨(55)는 최근 실선 구간에서 차선을 바꾼 게 시민 제보로 적발되면서 3만원의 범칙금을 냈다. 최씨는 “그 전까지 위법인 줄 알면서도 경찰만 안 보이면 습관적으로 차선을 변경했지만 공익신고를 받은 이후부터는 아무래도 운전을 조심하게 된다”고 말했다.
운전 중 휴대폰 사용(1952건)이나 급제동(515건) 등 CCTV로 위반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웠던 행위까지 적발이 가능해지면서 단속의 사각지대가 크게 줄었다는 게 경찰 측 설명이다. 한 일선 경찰서 교통과장은 “주행 중인 자동차 운전자가 휴대폰을 사용하는지는 사실 경찰이 일일이 단속하기 어려운데 이 같은 빈틈을 공익신고가 효과적으로 메워주고 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교통사고 예방 효과가 작지 않다는 게 경찰 측의 자체적인 평가다. 경찰청 관계자는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공익신고 증가와 교통사고 사망자 수 감소가 상당 부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며 “운전자들이 난폭운전에 대해 직접적인 보복 대신 공익신고를 택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자율주행차 시대를 앞당기는 데 공익신고가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서승우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한국에서 자율주행차가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게 도로 위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라며 “사소한 교통법규라도 철저하게 지켜지는 성숙한 문화를 만드는 데 공익신고 제도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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