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문화관광유산-강화] 전란때마다 피난처, 국난 극복의 현장…외침 맞선 '5진·7진보·54돈대' 고스란히

입력 2017-05-18 16:13
[ 김인완 기자 ] 강화는 단군성조의 개국과 그 역사를 같이하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애환과 개국의 얼이 살아 숨쉬는 역사의 고장인 동시에 조국수호와 국난극복의 현장이다.

고려시대 이래 국토방위의 요충지로 전란이 있을 때마다 피난처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강화는 전 지역에 걸쳐 우리 민족의 가슴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지닌 곳이다. 특히 한반도 최대 국방유적지이며 호국의 성지가 강화도 해안가에 빼곡히 남아 있다.

강화의 대표적인 국방유적은 ‘5진(鎭) 7진보(鎭堡) 54돈대(墩臺)’다. 여기서 말하는 ‘돈대’란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활동을 사전에 감시,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최전방 초소이며 보(堡)란 진(鎭) 소속의 파견대가 주둔하는 최전방 요새로서, 각 보에는 몇 개의 돈대가 소속돼 있었다.

최전방 요새를 진두지휘하던 5진은 제물진, 초지진, 용진진, 덕진진, 월곶진이다. 제물진은 현재 강화역사관이 있는 일대 였을 것으로 보이며 현재 이곳에는 강화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강화역사관과 갑곶돈대가 함께 있어 국민의 국방 교육장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초지진은 길상면 초지리와 김포시 대명리를 마주하며 사적 제225호로 지정돼 있다. 300여 년 전인 1656년 설치됐고 1679년 축조된 초지돈과 장자평돈, 섬암돈이 이곳 진에 소속됐다. 진내에는 6문의 포가 설치된 황산포대와 12문의 포가 설치된 진남포대가 있었다.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에 배가 3척 배치돼 있었으며 병인양요, 신미양요, 일본 군함 운양호 침공 등 근세까지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다. 이곳에 전시된 진품 대포 1문은 길이 2.3m, 입지름 40㎝의 대포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한 고관이 뜯어가 자기 별장에 기둥 밑받침으로 쓰고 있었는데 해방 직후 인계돼 현재까지 전시되고 있다.

용진진은 선원면 지산리 216에 있으며 이조 효종 7년(1656)에 창설했다. 군관 24명, 사병 59명, 돈군 18명의 병력이 주둔했다고 한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전개했던 곳이다. 포대 계단으로 내려가면 1867년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바다의 척화비라고도 불리는 방수경고비(防守警告碑)가 세워져 있다. 월곶진은 적북, 휴암, 월곶, 옥창 등 네 곳의 돈대를 관할했다. 병마첨절제사 1명, 군관 20명, 사병 87명, 돈군 20명이 배치됐다. 현재 이곳에는 연미정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보는 석양의 아름다움은 강화8경으로 알려져 있다.

또 진의 예하부대 진지라고 할 수 있는 7진보는 광성보를 비롯 선두보, 정포보, 장곶보, 인화보, 철곶보, 승천보 등이 있다.

광성보는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해안에 있으며 강화해협과 김포와 마주보고 있다. 1618년(조선 광해군 10년)에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다. 이곳은 신미양요의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였다.

강화=김인완 기자 iy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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