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이끄는 기초과학
(2) 고급두뇌 이탈·이공계 기피 부르는 '유리 장벽들'
열악한 처우·연구비 '가뭄'
30대가 연구 활동 정점인데
한국선 40대에나 자리 잡아
과학 정책은 '오락가락'
정권 바뀔 때마다 '지원 쏠림'
장기·도전적 연구 꿈도 못 꿔
[ 박근태 기자 ]
지난해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생명과학자상’을 받은 묵인희 서울대 의대 교수에게 요즘 근심거리가 생겼다. 얼마 전 연구실 연구원 두 명이 출산휴가를 떠났는데 이들이 언제 복귀할지 기약할 수 없어서다. 3개월 뒤 이들이 출산휴가에서 복귀해도 육아 대책이 서 있지 않은 게 근본 문제다. 묵 교수는 “상당수 젊은 여성 연구원은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다시 휴직하거나 연구 현장에 영영 못 돌아오기도 한다”며 “‘육아 족쇄’가 사회가 아깝게 키운 고급 두뇌를 잃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애써 키운 인재를 잃어버리는 일은 여성 과학자에게 국한한 문제만은 아니다. 젊은 과학자가 꿈과 사기를 꺾는 ‘열정페이’를 견디지 못해 떠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포스텍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와 과학기술단체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네트워크(ESC)’가 대선을 앞두고 한 설문 결과에서도 이 같은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젊은 과학자 좌절시키는 구습
BRIC가 지난 2월 전국 대학교수와 대학원생, 연구원 69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 절반(50%)은 주된 관심사로 비정규직, 신진 연구자 지원 정책 문제를 꼽았다. 응답자의 38%는 대학원생과 학연(연구소에서 연구와 학업을 병행하는) 연구생 처우 개선을 지목했다. ESC가 대선후보들에게 전달한 질의서에도 제도적 사각지대에 있는 대학원생의 처우 개선, 연구비 ‘빈부격차’를 겪는 신진 과학기술자 지원 대책이 핵심을 이뤘다.
한국에서 젊은 과학자 대다수는 차별 속에서 연구를 시작한다. 학기당 700만~800만원의 학비를 내면서도 저임금을 받고 4대 보험 등 기본적 안전망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일부 교수의 ‘갑질’로 인권침해를 당해도 호소할 길이 많지 않다. 학연 연구생도 정규직 연구원과 같은 일을 하지만 근로자 신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열악한 근로환경에 놓여 있다.
박사학위를 받아도 연구비를 확보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다. 노벨상 수상자 대부분이 20~30대 시작한 연구에서 상을 받는 데 비해 한국에선 이 시기 연구비를 따는 것부터 쉽지 않다. 김태정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는 “과학자는 30대 중반에 가장 왕성한 연구활동을 하는데 한국은 40대가 돼서야 겨우 자리를 잡는다”며 “현행 구조상 신진 과학자가 연구비를 따도 학생 인건비를 지원해야 하기 때문에 원하는 연구비 투자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대학원생의 처우와 연구비 분배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연구 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커져 고급 두뇌 이탈과 이공계 기피 현상을 심화시킬 것으로 우려한다.
오락가락하는 과학정책이 기회 박탈
오락가락하는 정부 정책도 도전적인 연구 문화 확산을 가로막고 있다. 녹색성장과 4대 강 사업, 창조경제 등 정권 입맛에 맞는 과학정책이 추진되면서 예산 낭비는 물론 한국 과학의 장기 비전이 사라졌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이 25일 발표한 대선후보 정당별 과학정책 분석 자료를 보면 이번 대선에서 후보들은 ‘4차 산업혁명’을 주요 과학기술 정책과 일자리 대책으로 내놨다. 정책대학원 관계자는 “대다수 후보가 4차 산업혁명 대응을 강조하고 있지만 어떤 위기와 기회를 가져다주는지 구체적 진단과 철학이 드러나지 않는다”며 “과거 정부처럼 다시 한 번 특정 주제로 연구비 지원이 쏠릴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과학계 관계자는 “정부 입맛에 맞는 특정 분야에 투자가 몰리면 독창적 아이디어를 가진 연구자에게 갈 예산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암과 치매 극복 프로젝트를 발표한 미국처럼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큰 틀에서 정책 방향을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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