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원 '가결'…6월8일 총선 확정
브렉시트 세부협상 전 입지 강화
집권당 지지율 훨씬 높아 해볼만
단일시장 잔류하는 방안 힘 실려
파운드화 가치 5개월 만에 최고
[ 이상은 기자 ] 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사진)가 갑작스럽게 던진 ‘조기 총선’ 카드에 대해 “앨프리드 히치콕(영국 태생의 미국 영화감독)의 스릴러영화 같다”고 촌평했다. 영국과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협상 과정을 예측할 수 없어 긴장감 넘치는 공포영화와 같을 것이라는 뜻이다.
메이 총리는 18일(현지시간) 영국 의회에 원래 예정된 2020년 5월7일 총선을 3년가량 앞당겨 오는 6월8일 치르자고 긴급 요청했다. 투스크 의장은 메이 총리에게 전화로 이 내용을 전달받은 직후 트위터에 “브렉시트를 연출한 사람은 히치콕”이라며 “처음엔 지진이 일어나고 점점 긴장이 고조된다”고 적었다. ‘좋은 영화는 지진처럼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해 긴장을 고조시켜야 한다’는 히치콕 감독의 영화론을 차용했다. 조기 총선으로 ‘더 강해진 상대’를 맞게 될 것이라는 EU 측의 복잡한 심경을 담은 발언으로 해석된다.
◆‘싹쓸이 승리’ 확신한 메이
선출직 의원인 영국 하원은 19일 메이 총리가 발의한 조기 총선 실시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522표, 반대 13표로 가결했다. 가결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 찬성을 가볍게 넘겼다.
조기 총선 가능성은 계속 제기돼 왔지만 지난달까지 메이 총리는 조기 총선 가능성을 부정했다. “자족적인 행위이며 불확실성을 키울 뿐”이라고 했다. 보수당에서도 이날 발표 직전까지 이 내용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메이 총리는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에 대해 야당과 상원이 자신의 “브렉시트 협상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현 상황을 ‘리더십의 문제’로 규정하고,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총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영국 언론들은 보수당 소속인 메이 총리가 총선을 빨리 치르면 대승을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이 카드를 꺼냈다고 분석했다. 2015년 치러진 지난 총선에서 총 650석 하원의석 중 보수당은 330석(50.8%) 노동당은 232석(35.7%), 스코틀랜드국민당은 56석(8.6%)을 가져갔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는 보수당에 우호적이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가 뚜렷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서다.
파이낸셜타임스와 텔레그래프 등 영국 언론들은 6월8일 조기 총선이 치러지면 노동당이 약 50석을 잃어 170석 정도에 머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경우 메이 총리는 마거릿 대처와 토니 블레어 전 총리 이후 세 번째로 ‘보수당 의석수가 노동당보다 100석 이상 많은’ 상황에서 총리직을 수행할 전망이다.
◆‘소프트 브렉시트’ 예상
조기 총선론이 나온 이날 파운드화 가치는 5개월 사이 최고 수준인 파운드당 1.2905달러까지 뛰어올랐다. 메이 총리의 입지가 탄탄해지면 보수당 내 강경 EU 회의론자를 배제하고도 협상을 추진할 수 있고, 쓸 수 있는 협상 카드도 늘어난다.
2019년 3월 EU를 탈퇴한 뒤에도 상당 기간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영국 내 기업 환경이 유지되는 ‘소프트 브렉시트’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받고 있다.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 이후에도 EU와 “깊고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으나, 강경 브렉시트 찬성론자들은 이런 계획에 반대해 왔다.
강경론자들은 영국의 EU 단일시장 접근과 외국인의 영국 이민을 차단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조기 총선에서 여론조사 결과대로 보수당이 압승을 거두면 메이 총리는 날개를 단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가 지난해 브렉시트를 결정한 국민투표 결과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 뒤 보수당 내 경선만으로 총리직을 거머쥔 그가 공식적인 국민의 지지를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캐머런의 유산과도 미련 없이 결별할 수 있다.
EU 관계자는 AFP통신에 “영국 내 문제여서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며 “우리는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협상할)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도 협상 대상자, 협상 방식 등은 바뀌지 않는다. 다만 메이 총리가 쓸 수 있는 카드가 늘어날 뿐이다. 메이 총리가 규정한 ‘좋은 거래’의 조건이 보다 포괄적으로 바뀌면 양측이 ‘윈윈’ 협상을 할 여지도 커진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