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존심' 도시바의 몰락…"남 일 아니다"

입력 2017-04-12 18:27
수정 2017-04-13 06:48
파벌주의 - CEO 나눠먹기…문외한이 원전사업
관료주의 - 뿌리깊은 상명하복, 예스맨만 남아
자기 최면 - 잘못된 길 가며 '괜찮다' 변명 급급

위기 닥쳤는데도 꿈쩍않은 파벌·관료주의…142년 도시바 '와르르'

5대 경영실패 원인

변화 없는 '유훈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경영진들, 고문으로 일하며 일일이 간섭

지름길만 찾다 길 잃어
정확한 시장분석 없이 위험 큰 원전사업 인수


[ 도쿄=김동욱 기자 ]
‘일본의 자존심’으로 불리던 도시바가 기업 존속을 걱정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지난 11일 도시바는 2016년 4~12월 실적을 발표했다. 5325억엔(약 5조5600억원) 영업적자, 2256억엔(약 2조3500억원) 자본잠식이란 숫자보다 회계법인의 ‘감사의견’ 없이 실적을 발표한 데 시장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자회사인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지난해 최대 1조엔(약 10조4500억원)대 손실을 본 탓에 올 2월과 3월 두 차례 실적 발표를 연기한 도시바는 상장폐지를 피하려고 ‘감사의견 없는 실적’이라는 고육책을 꺼냈다.

이런 ‘파행’을 두고 시장은 일본 최초로 냉장고와 세탁기, 컬러TV를 내놨고 세계 최초로 노트북과 낸드플래시 반도체를 개발한 142년 역사의 도시바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전날 도쿄주식시장에서 장중 7%대 급락한 도시바 주가는 이날도 한때 4% 넘게 떨어졌다. 도시바가 반도체사업을 3조엔(약 31조3600억원)이란 고가를 제시한 대만 훙하이에 넘기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도시바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위기상황으로 몰린 것은 원자력발전사업 실패가 직접적 원인이다.

일본 언론은 △경영진 내 파벌주의 △노선 수정 없는 경직성 △상명하복 문화 △정경유착의 ‘지름길’ 추구 △자기최면에 빠져 치유 기회를 놓친 점을 도시바의 5대 경영 실패 원인으로 꼽는다. 대우조선해양 등 ‘좀비기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으로선 도시바의 몰락이 남의 일이 아니란 지적이 나온다.

“10여년 전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할 때부터 위기가 시작됐지만 내부에서 제동을 걸려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일본 경제주간 도요게이자이) 도시바는 스스로 무너졌다. 그것도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기술의 도시바’로 불리던 일본 재계의 거인이 사선(死線)으로 몰린 원인으론 도시바 내부의 5대 실책이 거론된다. 일본 언론은 ‘도시바 병’은 도시바만의 문제가 아니라며 일본 산업계 전체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1) 파벌주의, 도시바를 좀먹다

지난 2월 기자간담회에서 ‘어디서부터 잘못됐나’는 기자의 질문에 쓰나카와 사토시 도시바 사장은 “2008년에 수주한 원전 사업”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일본 언론은 단순히 원전 사업에 참여키로 한 결정이 문제가 아니라 사업 결정과 경영이 철저하게 사내 파벌에 따라 전문성 없이 운영된 점을 근본 원인으로 지적한다.

1990년대 이후 도시바는 사업 성격이 판이한 반도체 사업과 인프라 사업을 양대 축으로 성장했다. 인프라 사업은 호흡이 긴 반면 반도체는 경기순환 주기가 짧아 양자 간 조화가 쉽지 않은 과제였다. 내부에선 ‘가전계’와 ‘인프라계’로 나뉘어 내부 경영권 다툼이 벌어졌다. 1990년대 이후 니시무로 다이조(가전 영업)→오카무라 다다시(사회 인프라)→니시다 아쓰토시(PC)→사사키 노리오(원자력)→다나카 히사오(PC 부품) 식으로 각 파벌이 번갈아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나눠먹었지만 미봉책이었다.

(2) 관료주의, ‘예스맨’만 남다

기술의 상징이던 도시바가 관료화되면서 ‘상명하복’ 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졌다. 경영진이 내린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판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실현 불가능한 목표가 떨어져도 각종 편법이 동원돼 달성한 것처럼 보이는 식의 문화가 만연했다. 도시바 임원진은 각 사업부문 책임자에게 ‘챌린지’라는 이름으로 과도한 수익목표를 설정해 압박했다. 3일 만에 12억엔의 수익 개선을 요구하는 식이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도시바 부문장들은 목표 달성을 위해 비용계상을 미루거나 이익을 과다계상하는 회계부정을 수시로 자행했다”고 꼬집었다.

(3) ‘유훈 경영’…노선 수정은 없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변화에 느렸다. 2000년대 들어 한국과 중국 가전업체가 급성장하자 경쟁력이 처졌다. 다른 일본 업체들은 가전 사업을 줄이고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는 등 변화를 모색했지만 도시바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결국 경영난이 악화된 뒤 쫓기듯 의료기기 사업을 캐논에 팔았고, 가전 부문은 중국 메이디그룹에 매각했다. 내수용으로 전락한 TV 사업마저 터키 베스텔 등에 팔기 위해 협상 중이다. 2008년 뛰어든 원전 사업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사업 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는데도 ‘하던 대로’를 고집했다.

변화를 이루지 못한 원인으로 일본 경제주간 다이아몬드는 일본 특유의 ‘유훈경영’ ‘장로경영’ 문화를 지적했다. 과거 경영진이 고문으로 남아 현직 경영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OB압력’이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4) ‘지름길’을 좇다

다이아몬드는 “도시바가 원전 사업에 발을 담근 계기가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확한 시장분석 없이 ‘원전 르네상스’를 부르짖으며 해외 시장 진출을 독려한 일본 정부로 책임의 화살을 돌렸다. 제너럴일렉트릭(GE) 등 경쟁사가 미래가 불투명하다며 웨스팅하우스 인수를 포기할 때 정치권의 권유에 원전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설명이다. “시가 시게노리 전 회장이 사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 ‘굵은 파이프’가 있어 원전 사업을 맡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5) 자기최면 탓 부활 기회를 잃다

일본 언론은 도시바 임직원들이 ‘자기최면’에 빠져 회생과 개선의 기회마저 잃었다고 지적했다. 조직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어도 각종 행사나 언론 브리핑을 통해 경영전략과 상황을 합리화하기에 급급했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도시바는 원전 사업 손실이 명확해진 2011년 이후에도 2017년이 되면 매출 1조엔을 달성할 것이라고 떠들었다”며 “합리성이 결여된 주장인데도 폐쇄적 기업문화 속에 반복되다 보니 조직원들이 세뇌될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