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아니지 않냐. 그나마 우리 때가 나았던 것 같아.”
소주잔을 한 번에 털어 넣은 친구가 말했다. 앞뒤 말 잘라내고 글로 옮기니 감상평 정도로 보인다. 실은 공분에 가까웠다. 그 친구에게 ‘이건 아닌 것’은 지금의 대입 수시전형, ‘그나마 나았던 것’은 우리가 치렀던 수능이었다.
글쎄, 그랬었나. 그해 11월 수능날 저녁을 떠올려본다. 답안지와 시험지를 번갈아보며 채점하는 내 등 뒤로 긴장된 분위기가 생생하다. “아… 이거 틀렸네.” 사선을 그을 때마다 안 보는 척하던 부모님의 숨죽인 한숨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기억의 유통기한은 짧다. 이미 그 시간을 통과한 자에게는 더더욱. 또 기억은 편의적이다. 하지만 찬찬히 반추하면 금세 그때가 되살아난다. 수능 다음날 아침이면 으레 “성적을 비관한 수험생이”로 시작하는 안타까운 뉴스가 들려오던 시절이었다.
수능으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당시 문제점은 해결됐다는 듯이. OX 문제 답 고르듯 수시전형에 X자 치고는 수능을 실력대로인 공정한 시험, ‘개천 용’ 살려내는 교육사다리로 의미 부여했다. 이 과정을 거쳐 수시 축소, 수능 확대는 대선주자 교육공약이 되었다.
맞는 방향일까? “시험 망친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이래서 되겠느냐고 분노하고 개탄하고… 그랬죠. 우리가 너무 쉽게 잊는 것 아닌가요.” 한 대학 입학처장이 답했다.
그렇다. 복고주의는 대부분 과거의 긍정적 면을 도드라지게 부각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다른 한 면은 쉽게 망각한다. 형평에 맞지 않는다. ‘수능 복고주의’의 반대 측면을 짚어봐야 하는 것은 그래서다.
수능이 나쁘기만 한 시험은 아니다. 한계가 명확할 뿐이다. 줄 세우기가 가장 크다. 점수는 편한 잣대다. 똑같은 줄이어서 그렇다. 전국 1등부터 50만~60만 등까지 착착 등급이 매겨진다. 대학 역시 성적순으로 잘라내면 힘들여 평가할 필요도, 시비가 생길 이유도 없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어떤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닌 학생을 선발할지, 그들을 길러낼 대학의 내용은 무엇이 돼야 할지 등의 구체적 고민은 뒤로 밀린다.
수능이 공정하다는 생각 역시 사실과 거리가 있다. 대치동 사교육에 훈련된 강남 아이들이 유리한 입시유형이 수능이다. 교육계에서는 정설로 통한다. 시뮬레이션 돌려봐도 그렇게 나온다. 수능이 객관적인 시험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곧 공정한 시험이라는 뜻은 아니란 얘기다.
수시전형은 너무 많은 준비를 요구하고(뭐가 이리 복잡한지!) 평가·선발과정이 불투명하며(점수 낮은 쟤는 붙고 높은 얘는 떨어지니 원!) 불안감에 사교육을 유발하는(그러니 ‘금수저’가 유리할 수밖에!) 나쁜 입시라는 게, 수능 회귀론자들 주장이다.
그렇지 않다. 수시전형 자리에 대신 수능을 넣어도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 모두 똑같아지기를 요구하고, 한 문제 맞느냐 틀리느냐에 인생이 갈리며, ‘실수 안 하기 경쟁’으로 전락해 제대로 실력 측정할 수 있을지 회의감마저 드는 시험이 수능이라고, 얼마든지 되받아칠 수 있다.
입시에는 만능해결책이 없다. 수시전형이냐, 수능이냐는 체감도에 비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제도에 따라 개개인의 유·불리가 달라지는 탓이다. 그런데 대선 국면에서 이슈화된다. 입시를 이리저리 뜯어고치면 재정투자 없이 표 얻기에 만만해서 그런가 하는 삐딱한 생각마저 든다.
무너진 교육사다리가 문제라면 손쉬운 길이 있다. 균형선발 확대다. 적어도 수능이며 수시전형을 줄이고 늘리는 것보다는 효과가 크다. 요는 입시방식의 손질이 아니다. 교육의 내용과 철학이다. 이제라도 미래교육 콘텐츠라는 본질을 다룬 정책이 나오길 바란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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