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현우 기자 ] ■ 체크 포인트
전문가들은 인종 간의 키 차이를 일으키는 유전적 인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식생활이 큰 영향을 준다고 봤다. 남·북 청소년의 키 차이가 10㎝가량 벌어진 것도 같은 이유다.
서울대 의대 연구팀이 15~19세기 조선시대 사람들의 평균 키를 유골과 미라를 토대로 추정한 결과 남자는 161.1㎝, 여자는 148.9㎝로 조사됐다. 2010년 한국인 인체치수조사를 보면 25~29세의 평균 키는 남자 173.6㎝, 여자 160.2㎝였다. 조선시대보다 각각 12.5㎝, 11.3㎝ 성장한 것이다.
“인종 아닌 식생활이 신장 좌우”
일본은 17~19세기 에도시대의 남성 평균 키가 155.1㎝에 불과했다. 일본을 ‘작다’는 의미의 왜(矮)와 발음이 똑같은 왜(倭)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 있다. 요즘 25~29세 일본 남자의 평균 키는 172.1㎝로, 에도시대보다 17㎝나 커졌다. 산업화 역사가 긴 일본이 성장 폭도 한국보다 훨씬 컸다. 서구권 선진국 사람들도 산업화 이후 키가 부쩍 커졌다. 영국 성인 남자는 산업화 이전인 18세기 중반 평균 165.1㎝에서 2008년 176.8㎝로 11.7㎝ 자랐다. 미국 남성들도 17~19세기 173.4㎝였지만 지금은 178.2㎝다. 반면 산업화 시작이 늦었던 중국 남성의 평균 키는 169.4㎝로 아직 작은 편이다.
미국 경제학자 그레고리 클라크는 《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라는 책에서 인종 간의 신장 차이를 일으키는 유전적 결정인자는 피그미족 정도를 제외하곤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어떤 음식을 먹는지, 즉 식생활이 신장에 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산업화를 거치기 전 한국과 일본의 남자는 미국 남자보다 12~18㎝나 작았지만 지금은 그 격차가 5~6㎝에 불과하다. 남·북한 청소년의 키 차이가 10㎝가량 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키 클수록 소득 높다? ‘신장 프리미엄’ 이론
키와 관련한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 몇 년 전 한 여대생이 TV에 나와 “180㎝가 안 되는 남자는 루저(패배자)”라고 발언했다가 난리가 난 적이 있다. 외모지상주의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이를 여과 없이 내보낸 방송사도 십자포화를 맞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제학계에서는 ‘키가 클수록 소득이 더 높아진다’는 도발적인 연구논문이 적잖이 나와있다. 이른바 ‘신장 프리미엄(height premium)’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학자 니콜라 퍼시소, 앤드루 포스틀웨이트, 댄 실버맨은 백인 남성 근로자의 키가 1인치 클수록 월급이 1.8%씩 늘어나는 상관관계를 보였다고 밝혔다(2004년 논문). 국내에도 비슷한 연구가 있다. 박기성, 이인재 교수는 한국 30~40대 남성을 분석한 결과 키가 1㎝ 증가하면 시간당 임금은 1.5% 상승하는 신장 프리미엄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2010년 논문).
이들 학자는 그 이유를 ‘사회화 과정’에서 찾았다. 청년기부터 키가 크면 스포츠, 이성교제, 교내외 활동 등이 활발해져 리더십, 자신감, 대인관계 기술 등의 인적자본을 쌓을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대학 진학 등의 학력 차이로 이어지고, 졸업 후 노동시장에서 임금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이다.
키가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진 않는다
외모의 효과를 어느정도 인정한다 해도, 그 자체가 성공의 보증수표일 수는 없다. 외모가 우월한 사람이 호감을 얻는 건 ‘후광 효과(halo effect)’ 때문이다. 후광 효과란 사람의 한 가지 특징에 대해 좋거나 나쁜 인상을 받으면 그의 다른 특징도 실제 이상으로 고평가 혹은 저평가되는 현상을 말한다. 대중들이 자주 범하는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다.
청소년들이 키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갈수록 극심하다고 한다. 깔창이나 키높이 신발은 말할 것도 없고 성장판을 열어준다는 주사도 불티난다. 하지만 키를 크게 하는 정답은 없다. 의학계 연구에 따르면 키는 영양, 수면, 운동과 연관이 높다. 잘 먹고, 충분히 자고, 즐겁게 운동하는 게 정석이라는 얘기다. 신장 프리미엄도 본질적으로 ‘자신감 있고 당당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임현우 한국경제신문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