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정 다양화' 실험 김희삼 GIST 교수 인터뷰
"대입변화 및 사회적 성공경로 다양화 노력 동반돼야"
"홍콩 학교수업, 학생이 과목 선택…이젠 '학습관광' 그만"
[김봉구의 소수의견]은 통념이나 대세와 거리가 있더라도 일리 있는 주장, 되새겨볼 만한 의견을 소개하는 기획인터뷰입니다. 우리사회의 다양한 작은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편집자 주>
핀란드 교육은 훌륭한 모델이다. 낙오자 없는 맞춤형 협력교육이 골자다. 국내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향해야 할 내용임에 틀림없다. 단 한국과는 문화적·역사적 맥락이 다르다.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서 교육개혁에 성공한, 현실적으로 참고할 만한 나라는 없을까.
김희삼 GIST(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교수(사진)의 눈에 띈 곳은 홍콩이었다. 교육열이 높고 범유교 문화권에 속하며 인적 자원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한국과 비슷했다. 입시용 주입식교육, 치열한 사교육경쟁 같은 병폐마저 닮은꼴이었다. 그런데 홍콩은 달라졌다. 현지를 다녀온 김 교수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홍콩은 2000년대 초반부터 교육개혁을 추진해오고 있어요. 중등학교(중·고교 통합형) 오전수업은 공통과목, 우리로 치면 국영수를 하죠. 오후수업은 전부 선택과목이에요. 학생이 스스로 시간표를 짭니다. 그러다보니 교육과정이 개별화·다양화됐죠. 한국의 수능 격인 대입시험 선택과목 조합이 1000가지가 넘어요.”
- 1000가지 이상? 우리 같으면 난리 나겠다.
“그럴 거다. 1~2점 차로 대입 당락이 갈리니 그럴 수밖에. 홍콩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입시의 영향력이 크다. 그래서 입시개혁과 같이 갔다. 수능을 논술·서술형으로 바꿨다. 점수도 5등급으로만 구분한다. 홍콩의 학교 교육이 바뀔 수 있었던 건 입시개혁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 그렇게 하면 대학은 어떻게 수험생을 평가·선발하나.
“우리로 치면 학교생활기록부를 수능 성적과 함께 평가에 반영한다. 내신에서도 수행평가가 강조된다. 학생들이 소논문을 쓰고 실험·실습을 많이 하게끔 했다. 주입식교육 탈피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학교 현장이 바뀌었다. 수업은 토론식으로, 평가는 논술·서술형으로.”
- 현지에서 피부로 느낀 점이 있다면.
“중등학교 오후수업은 학생들이 상담을 통해 선택과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예컨대 제2외국어에 적성과 관심이 있으면 오후수업은 거기에 집중하면 된다. 특히 중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취업할 학생들은 그 시간에 위탁기관으로 가 직업교육 받도록 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모두가 대학을 가는 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우리와 달리 이들은 고졸이든 대졸이든 25세 전후로 어떤 분야에 대한 체계적 준비를 마친 뒤 노동시장에 진입한다.”
- 학교 교육 변화와 입시개혁 병행, 동의한다. 문제는 실행력이다.
“교육개혁의 필요성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무엇을 건드리는 게 좋을지, 어떤 형태가 우리에게 적합한지는 세세히 연구·검토해야 한다. 현행 학교 구조나 교원 수급시스템에선 어려울 수 있다. 일반고와 자율형사립고·특수목적고 사정은 또 다르고. 교원 대폭 재배치를 비롯한 전체적인 구조개편이 있어야 한다.”
- 교육만 바꿔선 안 된다는 말인가.
“노동시장, 산업구조 등 교육과 연동된 사회 전반을 바꾸자는 논의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홍콩의 경우 사회 전체를 바꿨다고 하긴 어렵다. 범위를 좁혀 초·중등교육과 대입을 바꿨다. 더 이상 아이들을 수업시간에 재우지 않는 것, 각자의 적성과 진로에 맞춰 미래 필요역량을 가르치고 준비할 수 있게 하는 것. 우리도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수업 내용을 바꾸고 이를 유도하는 입시 변화부터 만들어내자는 얘기다.”
김 교수는 답을 술술 내놓는 인터뷰이가 아니었다. 질문하는 기자에게 종종 되물었다. “교육개혁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육만 바꿔서 될까요?” “학교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한 번 더 곱씹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가 말하는 ‘학교 교육 변화’의 요체구나 싶었다. 김 교수에게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 왜 홍콩인가. 벤치마킹 모델은 적지 않다. 핀란드 교육이라든지.
“핀란드나 스웨덴, 독일 같은 곳은 우리와 사회시스템이 다르다. 문화·역사·제도의 차이가 있는데 교육모델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지 않겠나. 한국과 유사한 곳 위주로 살펴봤다. 홍콩과 싱가포르가 인상 깊었다. 처한 상황이나 맥락이 우리와 비슷하면서 교육혁신을 이뤄낸 나라들이다.”
- 그들은 어떻게 교육개혁에 성공했나.
“싱가포르부터 보자. 1990년대 중후반 ‘생각하는 학교, 배우는 나라(Thinking School, Learning Nation)’를 국가 교육혁신 모토로 삼았다. 20년 정도 지났는데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유효해 보인다. 지금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나?”
- 글쎄, 워낙 여러 가지라….
“수업시간에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학습관광’이라고 하더라. 학생들 교감신경계가 잠잘 때보다 수업시간에 더 비활성화돼 있다고 한다.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기회를 줘도 한국 기자들이 질문 못한 에피소드, 기억날 것이다. 이것이 생각과 질문을 하지 않는 주입식교육의 폐해다. 생각하게끔 만드는 평생학습이 필요하다.”
- 문제를 정의했다면 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워야 한다.
“홍콩도 좋은 대학을 나와야 괜찮은 일자리를 얻는, 단선적이고 일점집중형인 성공방정식이 근본 문제였다. 좁은 문, 똑같은 틀에서 벌어지는 획일적 경쟁이 주입식교육과 사교육 과열로 귀결됐다. 홍콩 교육개혁은 틀을 바꾸는 데 목표를 뒀다. 한 마디로 ‘교육과정의 다양화를 통한 성공경로의 다변화’라 할 수 있다.”
-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교육사다리의 성격 변화다. 우리는 ‘개천 용’을 얘기한다. 교육을 통한 ‘계층 점프’를 바란다. 이때 개천 용이 타고 오르는 사다리는 정해져 있다. 소수만 성공한다. 홍콩의 시사점은, 다소 길이가 짧더라도 여러 영역에 사다리를 세우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다양화다. 홍콩이 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김 교수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의 경제학자다. 좀 유별났다. 돈보다는 ‘사람’에 관심이 많았다. 석·박사논문 주제 역시 노동, 교육 쪽이었고 주로 인적 자원 분야 커리어를 쌓아왔다. 명함에는 경제학박사와 함께 ‘교육연구자’라고 적었다. 그가 장기 시계열 분석을 통한 교육의 계층이동성 연구를 해온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있다.
- 한국에서 개천 용 프레임은 매우 강력하다.
“사회의 이동성이 굉장히 높았던 경험 때문에 그렇다. 한국은 전쟁으로 모든 게 파괴되었다. 이후 급성장 시기를 거치면서 교육을 통해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어떻게 보면 드물고 특수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사람들은 교육사다리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갖게 됐다.”
- 여러 지표를 보면 이미 그 시기가 지나간 듯한데.
“이제 사다리보다는 신분이 나뉘어 대물림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위대한 개츠비 곡선’이란 게 있다. 소득불평등과 세대간 계층대물림이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내용이다. 특히 교육이 매개체가 된다. 그런데 미국 케이스를 분석하니 재미있는 경향성이 보였다. 빈부 격차는 커졌는데 세대간 계층대물림 정도는 심해지지 않았다.”
- 왜 그런가.
“정책적 개입 효과로 보인다. 적극적인 각종 차별 시정, 인종적·계층적 다양성 확보 조치, 소득에 따른 등록금 차별화 등이 해당된다. 미국 대학들은 선발철학 자체를 능력 평가보다 잠재력 발굴에 포커스를 맞추기도 한다. 이동성 측면에서 취약계층에 대한 기회를 늘려 간극을 줄이고 대물림 심화를 방지한 것이다.”
- 국내에서도 교육의 계층이동성을 높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크다. 한 방편으로 ‘깜깜이 전형’ 수시선발을 줄이고 수능 위주로 가자는 주장이 나온다.
“글쎄. 입시방식을 바꿔 계층이동성을 개선할 수 있을까? 수시전형이 준비할 것도 많고 정보력 차이가 있다 보니 그런 얘기가 나오는데… 입시가 어떤 형식이든 지금과 같은 계층 격차는 존재했을 것이다. 수능으로만 선발해도 1등급 여부는 결국 고난이도 한 두 문제를 풀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그 능력은 대치동으로 상징되는 사교육에서 나오지 않겠나. 입시방식 손질은 계층이동성보다는 중·고교 교육의 내용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 앞서 언급한 ‘정책적 개입’은 있어야 하지 않나.
“입시에 너무 여러 가지를 요구하지 않았으면 한다. 입시가 학교 교육에 대한 ‘규정력’이 큰 건 사실이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여기에 집중해 수업부터 바꾸자. 계층이동성 문제는 별도 차원에서 대처할 필요가 있다. 선발방식에 손대기보다는 입시의 계층적 유·불리 보완 노력, 이를테면 대학의 균형선발을 확대하는 방법이 있겠다.”
그는 KDI에서 GIST로 옮긴 뒤 학교에서 ‘교육 임상’ 실험을 하고 있다. 수업방식을 교수 중심 강의에서 학생 중심 토론(flipped learning: 거꾸로 학습)으로 바꾸고 프로젝트 학습(PBL·Project-Based Learning)을 전면에 내세웠다. 학생들을 재우지 않는 수업, 방관자에서 행위자로 바꾸는 수업을 해보자는 취지다. 그랬더니 학생들 눈빛이 바뀌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강박은 착각이다. 학생들이 배움의 가치와 흥미를 익히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귀띔했다.
‘적게 가르치면 많이 배우는(Teach less, Learn more)’ 역설, 비울 때 오히려 늘어나는 생각의 창의성. “교육을 바꿔야 한다”는 구호만 되풀이하기엔 4차 산업혁명과 평생학습 시대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사진=최혁 한경닷컴 기자 choko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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