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품질 위해 일본 생산 고집…작은 도매상을 6위 업체로 키워
28세때 양말 도매상 창업
13년간 도매점서 일하다가 독립, 공장확보 위해 '현금 결제' 파격 조건
빚 늘었지만 돈 빌리는 기술도 늘어
재고 관리를 혁신하다
TV 노래프로그램서 힌트 얻어 컴퓨터 재고관리 전면 도입
팔린 만큼 실시간 제조 시스템 구축
양말 하나로 우뚝 서다
양말 신고 벗는 느낌 체크하려 거의 항상 맨발에 샌들 차림으로
2000년 오사카 증권거래소 상장, 연 매출 1680억원 중견기업으로
[ 임근호 기자 ]
일본 양말회사 다비오(タビオ)를 창업한 오치 나오마사(越智直正) 회장은 ‘양말의 신’으로 불린다. 1955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양말 도매상 도제 견습생으로 들어간 이후 한평생 양말에 미쳐 살았다.
양말의 탄력과 촉감을 느껴야 한다며 이로 양말을 깨물고, 볼에 대보는 것은 기본이다. 15세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항상 맨발에 샌들 차림이다. “양말을 신고 벗을 때의 느낌, 조이는 정도, 피부에 닿았을 때의 촉감 등을 정확하게 체크하기 위해선 평소에 양말을 신지 않는 것이 최고”라는 이유에서다.
60년 넘게 양말 사업 매진
오치 회장은 1939년 에히메(愛媛)현에서 태어났다. 자서전 《양말 외길 60년》에서 그는 “11형제 중 막내여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공부해’라는 잔소리를 들을 일이 없어 공부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장난꾸러기였던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언으로 중학교 3년을 마치자마자 오사카에서 보냈다. ‘킹 양말 스즈시카 상점’이라는 양말 도매점의 도제 견습생 자리였다. 얻어맞고 발로 차이며 몸으로 일을 익혔다.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모두가 먹을 식사 준비와 뒷정리, 청소, 개점 준비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새벽 1~2시까지 일하는 것이 예사였다.
일은 상상했던 것보다 힘들었다. 1주일 만에 ‘중졸로는 택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학교 때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제 견습생을 하더라도 앞으로는 고등학교는 나와야 인정받아. 그러니까 견습으로 일하러 가서도 계속 공부해. 중국 고전을 읽으렴. 어렵고 이해가 안 가도 포기하지 말고 백 번을 읽어.”
중국 고전을 찾는 그에게 헌책방 주인은 《손자(孫子)》를 쥐어주었다. 밤마다 한자사전을 붙잡고 읽었다. 18세쯤 되자 손자 13편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사기》 《삼국지》 《논어》 등 중국 고전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점장에게서도 호되게 배웠다. “만들라고 시켜서 만들었다고 해도 만든 것은 너다. 변명하지 마. 자기 책임이야.” “먼저 머리를 쓰고, 그 다음에 몸을 써. 돈은 최후의 수단이야. 돈으로 해결하는 건 바보라도 할 수 있어.” 모두 점장이 해준 말이다.
그곳에서 13년간 일한 오치 회장은 28세 때인 1968년 단삭스(현 다비오)를 창업했다. 공장에서 양말을 받아 소매상에 다시 파는 도매상이었다. 현실은 냉정했다. 알고 지내던 공장도 그와 거래하지 않으려 했다. 초짜 도매상이기도 했고 그가 이전 회사 점장과 다투고 나온 영향도 있었다.
그는 거래할 공장을 확보하기 위해 ‘월말 현금 지급’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웠다. 당시 중소 영세기업은 대부분 120일을 주기로 하는 어음을 발행했다. 월말 지급은 물건이 다 팔리기도 전에 공장에 생산 대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뜻이다. 도산 위험이 매우 높은 방식이었지만 그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공장은 확보했지만 빚이 급속도로 늘었다. 창업 5년이 지나자 부채가 7000만엔에 달했다. 하지만 돈을 빌리는 데 선수였다. 매일같이 돈을 빌리러 다녔다. 다만 변제일에 돈을 갚겠다는 약속은 꼭 지켰다. 이런 일도 있었다. 지인에게 500만엔을 갚아야 하는 날이었다. 정신없이 뛰어다닌 끝에 500만엔을 모아 갚으러 갔다. 지인이 “요즘 어때”라고 묻기에 오치 회장은 “사실 내일 모레까지 800만엔을 또 갚아야 해서 오늘 내일 돈 빌리러 다녀야 한다”고 했다. 지인은 오늘 가져온 500만엔을 가져가라며 300만엔도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오늘은 500만엔 갚고 내일 800만엔 빌리러 다시 오겠다고 했다. “약속대로 500만엔을 갚고 다음에 800만엔을 빌리는 것과,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300만엔을 추가로 빌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일상에서 얻은 힌트로 재고 관리 혁신
오치 회장은 세계 최고 품질의 양말을 만든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재고 관리는 그에게도 골칫거리였다. 잘 팔리는 양말은 재고가 부족하고, 안 팔리는 양말은 재고가 남아돌아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1982년 ‘구쓰시타야’라는 상호를 달고 소매업에 진출하고 문제는 더욱 커졌다. 재고를 파악해 공장 주문량을 조절하면 됐지만 전국 각지에 있는 점포에서 재고량을 파악하는 것은 당시만 해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힌트는 주변에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서점에서 책방 주인이 책에 꽂혀 있던 카드를 빼는 것을 봤다. 매출 관리와 상품 보충 주문을 위해 꽂아둔 ‘서적 매출 카드’였다. 오치 회장은 양말마다 품번과 컬러 번호가 적힌 관리 카드를 붙이고 판매할 때마다 찢어서 1주일에 한 번 본사로 발송하도록 했다. 회수된 카드만 집계하면 어떤 제품이 몇 개 팔렸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번엔 본사에 온 카드를 집계하는 것이 문제로 떠올랐다. 전국에서 거래처가 1400곳이나 됐다. 카드 정리만 담당하는 파트타임 직원을 4명 채용했지만 감당이 안 됐다. 집에서 TV로 노래 프로그램을 보고 있던 그의 눈에 사회자가 “이번 주 3위를 컴퓨터에 물어보겠습니다”하는 장면이 들어왔다. 어떤 가수가 얼마나 득표했는지 컴퓨터 화면에 바로 떴다.
오치 회장은 다비오에 컴퓨터를 전면 도입했다. 팔린 수량만큼 즉시 제조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본사뿐 아니라 공장과 점포에도 컴퓨터 시스템을 설치해야 했다. 공장을 설득하는 데만 2년이 걸렸다. 투자 비용이 신형 편물 기계 10대를 살 수 있을 만큼 비쌌던 탓이다.
지금은 다비오 본사와 협력 공장 47곳, 전국 각지 점포가 모두 컴퓨터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다. 생산 공장은 점포 재고를 실시간으로 확인해 다비오가 발주를 내기도 전에 생산을 시작한다. 하루 이틀 내에 상품을 보충할 수 있어 많은 재고를 쌓아둘 필요가 없다.
작은 양말 도매점이었던 다비오는 지금 일본 6위 양말업체로 컸다. 시장점유율이 6위지만 양말 하나만 만드는 전문업체는 다비오가 유일하다. 최고의 품질을 위해 ‘일본 국내 생산’만을 고집하며 이룬 결과다. 2000년 오사카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현재 여성용 양말을 중심으로 연간 3000~4000가지 양말을 기획해 팔고 있다. 일본에 직영점과 프랜차이즈를 합쳐 291개 점포가 있다. 2015년에 매출 166억9600만엔(약 1680억원), 경상이익 7억7100만엔(약 77억원)을 기록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