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종 <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
상하이(上海) 남쪽의 행정구역이 저장(浙江)이다. 이곳의 최대 하천인 첸탕(錢塘)이라는 강의 모양새 때문에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산지가 많아 굴곡이 심한 하천을 갈지자걸음과 같다고 해서 之江(지강), 꺾인 강이라 해서 折江(절강)이라고 했다가 지금의 명칭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설명이다. 약 10만5000㎢ 면적이라 중국에서는 크기가 작은 성(省)이지만 아주 깊은 인문의 전통이 숨 쉰다. 왕조시절 과거 급제자를 많이 배출했을 뿐 아니라, 그런 잠재력으로 경제발전이 아주 왕성하다.
이 지역 문화는 보통 오월(吳越)로 통칭한다. 삼국시대 조조(曹操) 유비(劉備) 등과 힘을 겨룬 손권(孫權)의 오(吳), 그에 앞서 춘추전국시대의 월(越)이 있던 지역이어서다.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일컫는 ‘江南(강남)’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그 북쪽의 장쑤(江蘇), 그리고 이 저장을 먼저 꼽는다.
중국 江南의 중심
중국에서 ‘강남’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우선 밝다. 꽃이 먼저 피는 번영과 안정의 그림이다. 그러나 북쪽에서 빈발했던 전쟁을 피하려 움직인 사람의 발길이 먼저 닿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작품에는 비감(悲感)도 서린다.
그는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서 자주 만났던 당시 최고 연예인 이귀년(李龜年)과 전란이 번진 뒤 지금 후난(湖南)의 창사(長沙)에서 해후한다. “마침 강남의 좋은 경치, 꽃 지는 때 그대를 다시 보는군요(正是江南好風景, 落花時節又逢君)”라고 적었다. 남북으로 약 450㎞인 저장의 언어는 크게 볼 때 타이후(太湖)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타이저우(台州)를 토대로 하는 남부로 나뉜다. 그러나 산지(山地)가 복잡하게 발달해 작은 지역마다 고립적인 방언이 발달한 점이 특징이다.
성 도회지인 항저우(杭州)는 지난해 G20 정상회의가 열려 더 유명해졌다. 이곳의 시후(西湖)는 풍광이 수려해 중국에서 퍽 인기다. 남쪽의 닝보(寧波)는 고려 개성과 일찌감치 해상교역을 벌였던 국제적인 항구다. 그 인근 위야오(餘姚)라는 곳은 한국인의 발길이 매우 뜸하지만 중국 문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다. 7000년 전 쌀을 지었던 도작(稻作)문명의 흔적 때문이다.
저장의 인문을 대표하는 지역은 따로 있다. 바로 사오싱(紹興)이다. 이 사오싱은 춘추시대 월나라 구천(勾踐)이 활동하던 당시의 수도였다. 그를 도와 오(吳)나라 부차(夫差)를 꺾은 범려(范)와 중국 최고 미녀 서시(西施) 등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고장이다.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 등 친숙한 성어와 고사가 나왔다.
'책사의 고향' 사오싱
이 사오싱은 중국 책사(策士)의 본향이다. 중국에서는 이 책사를 ‘師爺(사야)’라고 적었다. 권력자 주변에서 법률, 행정, 재무, 문서 등의 업무와 전략을 다루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을 일컫는 중국 표현이 ‘精明(정명)’이다. 각 분야에 매우 정통하고 치밀하며 사리에 밝다는 뜻이다. 이들은 명(明)과 청(淸)대에 활약이 매우 두드러졌다. 이 사오싱 출신 책사가 워낙 많아 “소흥이 없으면 관아를 구성하지 못한다(無紹不成衙)”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다.
청나라 말의 가장 유명한 관료였던 증국번(曾國藩) 및 이홍장(李鴻章)과 신해혁명을 이끌었던 쑨원(孫文), 각 지역 군벌의 막료 중 실력이 탁월한 사오싱 책사가 다수 포진했던 일은 요즘도 중국인에게 화제다. 중국 초대 총리로 빼어난 수완을 선보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이 전통을 이어받은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 책사가 옳은 정신 바탕을 기르지 못하면 사술에 능한 모사(謀士)에 그치기 쉽다. 매번 싸워 지는 장군의 전적(戰績)을 보고할 때 연전연패(連戰連敗)로 적지 않고, 연패연전(連敗連戰)으로 적어 거꾸로 황제의 칭찬을 얻어낸 일화는 유명하다. “지면서도 계속 싸웠다” 식의 말장난이다.
한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두고 중국의 횡포가 심해지고 있다. 일설에는 중국 관련 부처의 관계자들이 제 잇속에 맞춰 한국의 의도를 왜곡해 상층에 보고한다는 소식이 있다. 그래서 저장 여행길에 떠올려본 중국의 책사 전통이다.
유광종 <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