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부지런히 누빈 '역마의 노래'

입력 2017-03-05 18:50
서효인 씨 새 시집 '여수' 출간


[ 양병훈 기자 ] “울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몸 잘린 오징어처럼 손가락을 펴고, 강릉의 파도를 천천히 받아 적기 시작한다.”(‘강릉’ 부분)

서효인 시인(사진)이 6년 만에 새 시집 《여수》(문학과지성사)를 냈다. 그의 이번 작품집은 ‘역마(驛馬)의 시집’이라고 부를 만하다. 수록된 63편의 시 중 50편이 특정 장소에 관한 것이다. 대도시에서부터 작은 마을까지, 바닷가에서 섬까지 전국 동서남북을 부지런히 누비며 그 장소에 대한 시어를 토해낸다.

1000만 인구가 사는 서울의 이미지는 어떨까. “여자는 구로의 미싱사가 되었다. / 여자의 친구는 영등포에서 몸을 팔았다. / 여자의 남편이 될 사람은 다리를 절었다. / (중략) / 여자는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를 사랑한다. / 그는 유기농 생고구마를 씹으며 창가에 서 있다. / 아이는 창 아래 공원에서 조깅을 한다. / 여자는 공원을 가로지르는 청담대교 위에 있다.”(‘서울’ 부분)

다양한 사람의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표제작이기도 한 ‘여수’는 서 시인의 처가가 있는 곳이다. 그는 이 시에서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을 가만히 되새겨본다. “너의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다 /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 네 얼굴을 닮아버린 해안은 / 세계를 통틀어 여기뿐이므로 // 표정이 울상인 너를 사랑하게 된 날이 / 있었다 무서운 사랑이 / 시작되었다”(‘여수’ 부분)

시들은 대부분 풍경을 노래하기보다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장소를 시의 제목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알고 보면 그 장소 자체보다 해당 장소와 관련 있는 사람에 대한 시들이다. ‘구로’에서는 미싱사와 노동자를, ‘신촌’에서는 화염병과 최루탄을 주고받던 대학생과 경찰을, ‘마포’에서는 막차를 타고 귀가하는 노동시장의 패잔병들을, ‘마산’에서는 자유무역단지에서 빠져나오는 여공을 떠올린다.

역사에 대한 얘기도 줄곧 한다. ‘자유로’에서는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자기 모습에서 시작해 1968년 북한이 침투시킨 무장간첩 김신조를 떠올린다. “그는 대통령의 목을 따버리기 위해 빠른 속도로 능선을 타고 넘었다. (중략) 서울로 진입하는 모든 도로가 정체라고 라디오는 전한다. 야전 지도는 서울의 서쪽 어딘가로 그를 이끈다. 우린 늦었고 그는 목사가 되었다.”

김형중 문학평론가는 “이번 시집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정념은 우울”이라며 “세계의 상태를 바로 본 정직하고 현명한 자들은 두루 우울했다. 진정한 희망은 그런 의미에서 장수의 비결이라기보다는 우울의 자식에 가깝다”고 말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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