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윤의 '중국과 中國' (14) 충성-2] 국가·회사보다 파벌·개인 이익이 우선

입력 2017-02-27 17:25
수정 2017-07-18 10:32
류재윤 < 한국콜마 고문 >


앞 글에서 중국인의 충성개념에 대해 소개했다. 忠孝難兩全(충효는 둘 다 잘하기 어렵다)이라고 하는데, 충보다는 효를 우선하는 경향이 짙다. 중국인들은 회사의 이익(충)과 개인(또는 사적 집단)의 그것이 부딪치면 대부분 후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 조직을 꾸려나가는 우리나라 기업의 ‘충’에 대한 강조는 자칫 ‘불충’으로 통할 수도 있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고든 레딩(Gordon Redding)은 그의 저서 《華人資本主義精神(중국인의 자본주의정신)》에서 “전문 경영으로의 이행에서 중국인이 갖는 어려움은 그들의 가족주의적 성격과 연관되어 있다… 인척관계에 있는 사람만을 신뢰하고, 가족이나 혈연집단 외의 다른 사람은 불신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소집단 또는 파벌이 만연

“국가는 너무 커서 (내 개인 이익을 보호 못하니) 믿지 못하고, 개인은 너무 작아서 (나를 보호할 능력이 안 되니) 믿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중국인들은 ‘나’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사람들끼리 어울린다. 조직 내외에서 파벌을 만든다. 이런 류의 사(私)조직은 당연히 공개적이거나 공적이지 않다. 조직 내외의 아는 이들끼리의 파벌이다. 혈연, 지연, 학연 및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엮여진다.

만약 어느 회사가 누군가를 팀장으로 채용하게 되면, 혼자 오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일단 혼자 온다면 최소한의 짧은 시간 내에 자기 인맥으로 요직을 메꾸려고 노력한다. 기존의 인재를 활용하기보다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외부의 인사를 모으는 경향이 뚜렷하다. 任人唯賢(사람을 임용할 때 현명함을 우선한다)과 任人唯親(나와 친소관계를 본다)은 인재 채용의 두 가지 원칙이다. 업무능력과 충성은 채용에 있어서 어느 조직이든 매우 중요시하는 덕목이다. 문제는 중국에서의 충은 조직이 아니라 항상 나에게의 충성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중국인의 관시는 널리 확장되는 원심력이 작용한다고 얘기했었다. 반면 충성에는 소위 강력한 ‘구심력’이 작용한다. 공공의 이익보다 우선 사조직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이런 은폐된 ‘관시왕(關係網·사조직)’이 만약 발견되지 않거나 혹은 제재를 받지 않는다면 (조직에 대한) 파괴성은 상당히 크다”고 레딩은 경고했다.

양충(楊忠) 교수는 중국의 회사 조직에서 이런 사조직(파벌)이 생기는 원인을 ‘중국인 특유의 강한 귀속 욕구, 단체 내의 배타적인 분위기, 그리고 권력에 대한 추구와 욕망’ 때문이라고 했다. 풀어 보면 끼리끼리 모여서 자기들끼리만 정보를 발설(여기에는 조직의 중요한 대외비도 포함된다) 및 교환한다. 이렇게 형성된 소집단(관시, 파벌 또는 사조직)을 지렛대로 활용해 궁극적으로 새로운 권력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한편 중국인 인재들이 회사를 떠날 때도 혼자 나가는 경우가 드물다. 자신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영업망, 정보 및 기술 등도 함께 갖고 나간다. 레딩은 “중국인들은 이를 용인하는 경향이 있다”고 강조했다.

성급한 판단보다 이해가 우선

모 기업에서 매우 특별하게 처우를 해가며 양성한 현지 직원이 있었다. 그의 한국인 상사는 주위 사람들의 질시에도 불구하고 ‘내 동생처럼 아낀다’며 그를 지나칠 정도로 감싸고 돌았다. 그 현지 직원은 결국 임원으로 승진하기까지 이르렀는데, 뜻밖에 임원 발표 다음 날 회사에 사표를 냈다. 공식 통지 전날 사장을 포함한 많은 임원 앞에서 ‘충성’을 다짐하며 승진에 대한 감사를 표했던 그는 왜 공식 발표 이튿날 사표를 냈을까? 애초에 회사 또는 조직에 대한 충성 개념이 우리와 달랐던 것이다. 그의 충성을 믿었던 한국인 상사 역시 중국인의 충성 개념에 착각이 있었다. 아마도 그와 중국식 의리를 주고받을 만큼의 ‘충분한 친분(관시)’을 형성했다면 이런 황당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여주는 중국인들의 충성을 우리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중국에서의 조직에서 이런 행위가 맞다 틀리다를 따지는 것은 적절치 않다. 농구라는 게임의 규칙에 익숙한 이들은 발로 공을 다루는 축구를 이해하기 힘들다. 원칙과 규칙은 게임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그 게임의 룰을 먼저 이해하고, 적용하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먼저 중국에서의 ‘게임의 규칙’, 즉 문화를 이해하도록 노력하자. 다른 것은 다를 뿐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라고 이해하자. 판단과 적용이라는 선택지는 그 다음에 해야 할 우리의 몫이다.

류재윤 < 한국콜마 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