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전문가 이원덕 국민대 교수 인터뷰
위안부 합의 '본질'은 일본의 책임인정·공식사죄·법적배상
"소녀상 쟁점화, 日우익 주장에 휘말리는 결과 낳을 수도"
[김봉구의 소수의견]은 통념이나 대세와 거리가 있더라도 일리 있는 주장, 되새겨볼 만한 의견을 소개하는 기획인터뷰입니다. 우리사회의 다양한 작은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편집자 주>
작년 12월28일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됐다. 한·일 외교장관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 후 꼭 1년 만이었다. 관할 자치단체인 부산 동구청은 소녀상을 철거했다. 여론은 활활 타올랐다. 소녀상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일본 정부가 움직였다. 항의의 뜻으로 올해 초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들였다. ‘일시 귀국’ 조치였으나 한 달이 넘도록 일본대사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일본 현지 여론은 아베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니혼게이자이·요미우리·아사히신문 등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대사 귀국 조치를 비롯한 일본 정부의 대응에 대해 “지지한다” 혹은 “타당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72~75%에 달했다.
한일관계 전문가인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장(국제학부 교수·사진)은 이 대목을 우려했다. “일본은 단일하지 않아요. 내부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합니다. 특히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일본 국민의 절반이 ‘사죄·반성론’에 공감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소녀상 사태가 터진 겁니다.”
지난 17일 서울 서초구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이 교수는 “위안부 문제는 휘발성이 강력하다. 기존의 모든 논의를 삼켜버리는 양국 관계의 블랙홀 같은 이슈”라고 비유했다. 소녀상 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감정의 골을 건드리자, 보편적 여성인권 사안으로 다뤄지던 위안부 문제는 순식간에 민족주의적 갈등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현지 여론이 최악이에요. 이러면 일본 내 지한파나 합리적 진보 세력의 입지가 확 줄어듭니다. 위안부 문제에 연대할 수 있는 소중한 우군을 잃는 거예요. 우리 국민들 심정이야 누가 모르겠습니까. 다만 이런 맥락에서 소녀상의 ‘위치’는 전략적으로 판단하자는 것이죠.”
그가 해석하는 위안부 합의의 본질은 3가지다. 합의문 전반부의 골자인 일본 측 책임 인정, 공식 사죄, 법적 배상이 그것이다. 합의문 후반부, 즉 ‘10억 엔(약 101억 원) 거출’과 ‘소녀상 문제 해결 노력’ 등 후속조치 대목에서 벌어지는 지금의 논쟁은 지엽적이라고 봤다.
이 교수는 “10억 엔 받고 끝낸 것이냐, 그 대가로 소녀상까지 철거해야 하느냐 등의 논쟁은 일본 우익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싸운다는 점에서 그들의 논리에 휘말리는 측면이 있다”고 짚은 뒤 “아베 정부가 위안부 합의의 정신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바로 그 지점에서 논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 우리 땅에 소녀상을 세우는 게 뭐가 문제인가.
“국제 규범에 비추어 빈축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비엔나협약 22조다. 외국 공관에 대한 조형물 설치를 규제하는 내용이다. 소녀상이라는 특수성을 괄호 치고 제3자 관점에서 보면 외국 공관 앞 조형물 설치가 이례적인 것은 맞다.”
- 일본 측이 합의와는 동떨어진 망언을 계속하지 않았나.
“당연히 일본에 항의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단 장소는 전략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정확히 하자. 소녀상 자체를 문제 삼은 게 아니다. 위치가 문제다. 외교 공관의 안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조형물을 설치한 것, 이건 외교 상식에 어긋난다는 거다. 어찌 보면 불필요한 쟁점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 어떤 점에서?
“핑계거리를 줬다고 할까. 국제 규범 차원에서 우리의 협상력을 떨어뜨리는 요소라 판단한다. 만약 일본이 소녀상 자체를 거론했다면 보편적 여성인권 차원에서 국제 정서가 우리 손을 들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위치 문제가 얽히면서 외교 문제로 비화될 여지를 남겼다. 일본 현지 여론이 악화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 현지 여론이 많이 안 좋나.
“거의 ‘혐한’ 수준이다. 양국 정부가 특정 사안 때문에 갈등을 빚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도 일본의 민간 부문에는 한국에 우호적인 세력이 있었다. 특히 위안부 문제는 일본 국민의 절반 정도가 ‘일본이 사죄·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소녀상 갈등을 겪으면서 이런 목소리가 쑥 들어갔다.”
- 확실히 그건 문제다.
“일본에는 우익만 있는 게 아니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세력이 있다. 개중엔 위안부 문제 해결에 우리와 연대할 만한 이들도 있다. 그들의 입지가 줄어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당장 재일교포들 삶도 팍팍해졌다. 재일동포만 해도 조총련계, 귀화자 등 얼추 100만 명은 될 것이다.”
실제로 최근 방한한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오공태 단장은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만나 부산 소녀상 이전을 요구하는 ‘요망서’를 전달했다. 일본 내 한국에 대한 여론 악화로 재일동포 사회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때와 비교한다면.
“사안이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그때도 국제사회에서의 입지가 약화됐다. 순수한 동기와 강력한 메시지가 결과까지 담보하지는 않는다. 지금도 그런 점이 비슷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애국의 ‘방법론’이다.”
- 전략적 접근, 좋다. 그런데 그 방법론이 우리의 손발을 묶는 것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눈치 보자는 게 아니라 본질을 보자는 것이다. 소녀상 문제가 왜 생겼나. 위안부 합의에서 파생됐다. 합의의 본질이 뭐였나.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반성하며 그에 따라 정부 예산을 거출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잘 이행된다는 전제 하에 양국 정부가 소녀상 문제 해결에 노력한다고 합의했다.”
- 전제가 충족 안 되면 우리도 움직일 필요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렇다. 아베 총리부터 ‘사죄 편지를 쓸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도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합의를 심각하게 위배한 셈이다. 이처럼 일본 측이 전제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는 데 대해 우리도 강력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 그게 안 되니 시민단체들이 앞장서 소녀상을 만들어 세운 것 아닌가.
“심정은 이해한다. 일본 측이 사죄한다고 해놓고 딴소리 하거나 사실상 합의 정신을 훼손, 위반하니까…. 그런데 우리 정부가 제대로 역할을 못하니 시민사회 차원에서라도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 정권을 잡으면 위안부 합의를 철회, 재검토하겠다는 대선주자도 있는데.
“그건 간단치 않은 문제다. 차기 정부에서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거나 전면 철회, 또는 백지화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과거 정권의 합의 내용을 뒤집을 수 있다. 현실은 다르다. 실질적인 손익계산, 그리고 파기 후 생산적 대안을 도출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물론 경제·안보·문화 등 모든 분야의 대일 외교가 중단되고 양국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는다 해도 이 문제가 더 중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지. 단 합리적으로 판단하면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 교수는 “우리 의지로만 양국 합의를 파기할 수 있다는 건 순진한 발상이다. 일본은 재협상에 절대 응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통령 취임 후 오바마 정부의 약속을 뒤집거나 깨는 트럼프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는지 상기해보자”고 했다. 이어 합의를 철저히 ‘검증’하는 작업이 우선순위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합의 검증은 어떤 의미가 있나. 구체적으로 뭐가 달라진다는 건가?
“합의문을 정독해보라. 국민적 오해가 있다. 10억 엔에 위안부 문제를 팔아넘겼다는 게 대표적이다. 이건 사실 일본 우익의 시각과 맥을 같이 한다. 정식 외교문서는 아니지만 공동기자회견 당시 기시다 외무상이 읽은 전반부가 위안부 합의의 핵심이다.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 ‘총리 명의 사죄’, ‘사죄의 징표로 국가 예산 거출’의 3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명징한 표현을 쓰지는 않았어도 사실상 일본 측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으로 해석하는 게 맞다.”
- 본질에 초점을 맞춰 정공법을 펴자는 주장으로 풀이하면 되나.
“일본 우익의 논리에 끌려들어갈 이유가 없다는 거다. 앞서 말한 대로 소녀상 논란은 곁가지다. 줄기는 위안부 합의 이행이다. 논쟁의 장을 줄기로 옮기자. 또 하나 간과한 게 있다. 위안부 합의는 어디까지나 양국 정부가 ‘외교 아젠다(의제)로 재론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민간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건 얼마든지 열려있다.”
- 졸속 합의라는 비판은 여전하다.
“물론 미흡한 부분도 있고 불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있는 외교 협상에서 100대 0의 게임은 있을 수 없다. 외교 협상은 국가 간 이익을 쟁투하는 장이다. 큰 틀에서 판을 깨고 나오거나 적절한 수준에서 합의하거나, 두 가지 경우의 수밖에 없다. 합의의 본질을 오독하지 않는다면 위안부 합의가 최선은 아니어도 차선 정도는 된다고 평가한다.”
- 애초에 “위안부 합의 없이는 정상회담도 없다”던 박근혜 정부의 벼랑 끝 외교가 진짜 문제 아니었나. 결과적으로 발목을 잡았는데.
“자승자박한 거다. 외교는 단일 이슈를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밀어붙이면 안 된다. 그렇게 못 박아버리면 다른 해결책이 나올 수 없지 않나. 유사한 맥락에서 위안부 문제의 완전 해결이란 있을 수 없다. 양국 학계에서 공동연구·조사를 통해 철저히 진상 규명하고 추모, 교육 등 장기적 운동을 벌여나가야 한다. 양국 정부 간 외교적 합의가 모든 층위에서의 ‘최종적, 불가역적’ 종결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부 잘못은 비판하되 일본 우익의 담론을 우리가 받아들이지는 말자.”
- 정부 비판과 대응 프레임은 별개로 가져가야 한다는 얘기인가.
“외교 협정은 원래 문구가 추상적이다. 지금은 2단계 ‘해석전쟁’ 중이다. 여기서 밀리고 있다. 정부는 손을 놓았고 민간의 비판도 내부를 향했다. 우리 스스로 ‘소녀상 합의’로 규정하면 프레임이 그렇게 짜인다. 아베의 중장기 정책은 크게 네 방향으로 나뉜다. 첫째 평화헌법 개정, 둘째 군사·안보 분야 역할 확대, 셋째 역사 수정주의, 넷째 영토 주권 확립이다. 우리도 이러한 추세를 머릿속에 넣고 일희일비하지 않으면서 전략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사진=최혁 한경닷컴 기자 choko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