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을 떠나보내며①

입력 2017-02-20 09:38
수정 2017-02-21 13:27


(편집자주-정남돈 선생은 1990년 조양상선이 국내 최초로 세계일주항로를 개척할 때 개발팀장을 맡아 활약했고, 이후 세양선박 대표 등을 지낸 해운업계 원로입니다. 기고문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1. 서언

이 나라 민족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한 세계 7위의 덩치, 97척 컨테이너 벌크 선을 합쳐 143척의 선박들. 빌린 선박은 자기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는 사선들은 모두 팔고 흩어져 사금파리처럼 쪼개져 버렸다. 미안해요 한진해운! 한 시대의 역군을 이렇게 떠나가는 너를 보고 있는 나약한 이 나라 환경을 용서해 주게.

우리 선지자들은 그 체구를 키우려고 그렇게 불철주야 달렸지. 육지는 휴일이 있어도 바다에서는 일각의 휴일도 없었지. 항해하다 변침코스를 잘 못 지령하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그날은 브리지(항해통제실)에 얼씬도 못하게 후배들을 살벌하게 다그치고 단련시켰지. 그렇게 1만 톤급 잡화선도 우리 화물이 모자라 일본 항구를 들러 선창에 더 보태고 채워, 태평양을 건너, 날자 변경선을 넘으며 실수 없이 아메리카 롱비치 항구를 찾아갔지.

대권항해도 하고 점장항해로 위도를 따라가기도 하며, 천측을 해 보름동안 별자리 따라 가며 침로를 조정하며 달렸지. 때로는 롱비치를 내려와 그 너머 남쪽으로, 미 서해안을 따라 일주일을 달리면 파나마 운하에 도착하고 또 16 시간동안 수면도 없이 운하를 건너 짙푸른 대서양에 닿고, 차갑게 부는 진눈깨비 찬바람 맞으며 또 북방으로 닷새간 항해한다. 카스트로가 살던 쿠바 섬을 재치고 침로 000도 북으로 곧장 가면, 뉴욕항구의 자유의 여신상이 반갑게 맞이한다. 책으로 보았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마치 재즈 음악이 흘러내릴 것 같은 마천루 빌딩 숲 그 골목사이를 보며 부룩크린 뒷골목 부두에 닿을 내린다. 때는 1972년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상갑판 온도는 - 42도 이었다.

드디어 종착역, 쉬는 항구에 도착했구나! 미국 커피 한잔을 할 여가도 없이 재래식 크레인은 늘어지고 하역작업은 시작된다. 지금부터 12시간 후 아시아로 출항이다. 다음은 미 동부 발터모어 항, 그리고 찰스턴 휴스턴 칼베스턴 항을 훑듯이 들러, 산업 기계류 잡화를 조금 싣고, 남부 목화밭 덩어리로 선창을 만선하면 또 파나마 운하를 건너 한국으로 간다. 어느 날 목화수입상인 한국의 방적회사 직원과 텍사스의 목화밭(Cotton Field)으로 구경을 갔는데, 2시간을 자동차로 달려도 아직 끝나지 않아 과연 미국은 큰 나라라고 실감했다.

70년대 우리 산업은 이 코튼을 수입해 공장에서 실로 짜 직물을 만들고 샤츠로 가공해 다시 미국으로 이 배와 함께 수출하러 와야 했다. 1항차가 꼭 100일이 걸리는 셈이다. 초기 제조업 시절부터 우리 해운은 이들 목화 덩어리와 방적회사와 행동을 같이 했다. 이 잡화선 만이 외화를 버는 그 당시 유일한 대외 통상의 통로였던 것이다.

2. 달팽이 걸음

“배 한척이 또 들어 왔단다.” 이번에는 중고배가 아닌 새 배다. 왜구가 식민시대 보상으로(대일 청구권 자금을) 돌려주며, 1만 톤급 배를 건조해 변재하려 들어 왔단다. 미주항로에 4척, 동남아 항로에 2척이 들어 왔다. 정말 피맺힌 의미 있는 선박이다. 우리 조상들이 곳간을 빼앗기고 강제노동으로 고생하고 생을 마감하며 부역한 대가로 들어 왔으니 그 느낌이 남다르다. 그래서 날마다 아침이면 선원들은 구석구석 쓸고 닦고 애지중지하며 선실 내부를 살갑게 청소했다고 한다. 신조선이라 속도도 18 노트로 빠른 편이다. 예전 100일보다 더 빠르게 90일 만에 한국에 돌아간다.

처음부터 미국 시장을 개척한 한국정부의 수출전략은 꽉 막힌 아시아 주변국 보다 미국으로 향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그나마 당시 벙커연료 값은 저렴해 해운을 흑자를 내며 승승장구해 영국에서 이 크기와 비슷한 2척이 들어 왔으니 6척으로 미주항로 정기선으로 정착하기에 안성맞춤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잡화선의 유통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렇게 5~6년 운항하다 항로에서 사라지고, 이 미주항로는 새로 출현한 컨테이너 박스로 된 운송 시스템이 주력으로 바뀐다.

마침 1977년 주인은 해운공사, 대한선주를 거처 한진해운으로 재탄생하고, 본격적인 민간주인이 대양 컨테이너를 키우며 경쟁적인 상선대로 거듭난다. Welcome to Join Korean Fleet! 네가 우리 항구에 들어 올 때 한국의 운송수지는 적자를 면하고, 2016년 네가 사라질 때 운송수지는 20년 만에 적자가 났다. 그동안 같이 살 때는 너의 역할을 잊었다가 네가 가고나니 네의 고생을 알게 되었다. 만민의 피땀으로 벽돌처럼 쌓아 올린 그대가 가고 인사할 겨를 없이 보내 버렸네... 참으로 너를 보호해주지 못해 미안하네. (2편에서 계속)


ⓒ 한국경제 & hankyung.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