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현영 기자 ]
"주위에서 저보고 '미쳤다'고 했어요. 정년이 보장된 은행에서 나이 마흔에 떡하니 사표를 냈으니까요. 15년째 영화 투자업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세계 3대 영화제 수상으로 유명해진 P영화제작·배급사 막내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윤성욱 (주)와디즈(크라우드펀딩 중개 플랫폼) 투자담당 이사(41·사진)는 대기업 H그룹의 콘텐츠사업부를 거쳐 7년 전에 C벤처캐피탈 영화심사역 팀장으로 자리를 꿰찼다.
"영화쪽 일로 친해진 선배와 밥을 먹다가 C벤처의 영화투자 심사 팀장으로 가게 됐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그 형이 농담조로 '넌 너의 인생을 아니? 누가 누구를 심사한다는 거야?'하고 웃더라구요.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머릿속에서 선명해지더라구요. 콘텐츠 창작자들의 열정과 고민의 깊이를 볼수록 '투자 심사'라는 일이 창피하다고 느껴졌어요."
1년 만에 벤처캐피탈을 나온 그는 2012년 IBK기업은행의 콘텐츠금융팀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이곳에서 작년 4월까지 5년 동안 영화 투자와 자금 회수, 리스크 헤지(투자위험 회피) 기법 등 금융투자의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윤 이사는 용돈벌이로 영화 시사회의 진행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영화쪽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그리고 창작자들의 열정에 반했다.
IBK기업은행에 전문 계약직으로 입사했지만 성과를 인정받아 정규직을 따낸 윤 이사는 사내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기업가와 투자자를 직접 연결해 주고 '집단지성'을 생중계로 지켜볼 수 있는 크라우드펀딩(온라인을 통한 자금 모집) 중개업자를 만나고 나서 사표를 던지기 직전까지는 그랬다.
"와디즈를 이쪽에서 먼저 찾아갔어요. 당시 기업은행에서도 정책금융 지원 차원에서 증권형 크라우드펀딩 업무를 준비하고 있었죠. 크라우드펀딩 중개업자 중 와디즈가 1위(시장점유율) 사업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곳과 업무 제휴를 논의하려고 했죠."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와디즈에 접근했었다'라며 불쑥 혀를 내민 그는 속내를 들킨 듯했다. 덕분에 진짜 사표를 낸 이유를 듣게 됐다.
"영화 제작과 유통, 투자자금 조달과 수익 배분, 저작권 업무와 투자·정산 기법까지 이쪽 투자 업무만 15년 했어요. 경험이 쌓여도 투자 직전까지 의사결정이 늘 난항에 빠져요. 콘텐츠가 지닌 핵심 가치에 집중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서에요. 객관적이지 않은 작은 변수에도 투자결정이 엎어지는 경우가 허다해요."
은행과 증권사들 돈(금융자본)으로 영화에 투자하는 일은 늘 어려운 과정이라고 했다. 한국 영화의 기획, 투자, 배급까지 아우르는 대형 영화사들이 떼돈을 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정은 정반대인 경우가 상당수다. 예측이 불가능한 흥행 변수 외에도 투자기관의 내부 시스템이란 변수까지 더해져 온전한 콘텐츠를 소비자에게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셀 수 없이 많은 탓이다.
"시나리오(줄거리)를 보면 영화의 흥행을 예측할 수 있을까요. 콘텐츠 산업은 절대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봐요. 영화도 사람이 만들기 때문에 애초 의도대로 찍지 못해요. 여러 공정을 거치면서 내용뿐 아니라 배우까지 바뀌는 게 영화계죠. 여기에 금융자본이 개입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0.01% 손익'까지 따지는 곳인데 아무리 '모험 자본'이란 이름표를 달고 영화인들에게 팔을 벌려도 점검해야 할 사항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죠."
영화투자의 금융자본 집행자들은 옆 부서에서 비슷한 영화에 투자했는지, 투자가 실패할 경우 상급자의 책임과 문책 정도 그리고 평판이 안 좋은 인물과 연관된 콘텐츠인지, 유통사와 관계 여부까지 '보이고 들리는' 모든 사안이 투자 변수로 둔갑한다고 했다. 영화제작의 트리거(방아쇠)인 총괄책임자라고 해도 그들 역시 월급쟁이일 뿐이란 이야기로 들렸다.
"핵심을 벗어난 변수들과 혼자 씨름하던 중 와디즈 대표를 만났어요. 이 회사가 개방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에서 대기업으로부터 외면 받았거나 저예산으로 제작하려는 영화들이 제작비와 홍보비를 조달하고 있는 모습을 봤죠. 솔직히 금융자본의 시각에서만 보면 절대 투자하기 어려운 제작사와 수입사들 뿐이죠. 그런데 십시일반으로 순식간에 투자금이 불어나더라구요.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갔죠."
영화계는 아직까지 크라우드펀딩으로 파이낸싱(자금조달)을 시도하는 제작사에 '비주류'라는 낙인을 찍는다고 했다. 윤 이사는 그러나 영화 투자업계에서 모임을 가질 때마다 '이들이 아직도 비주류일까요?'라고 반문하고 다닌다. 대기업이 선택한 영화가 '주류'이고 그렇지 못한 영화가 '비주류'일까.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실체 없는 편견이라고 그는 결론지었다.
대기업 자본이 간택한 상업영화를 관객수(누적매출)로 따져본다면 이들 영화는 '주류'라고 부르기 어렵다. 영화진흥위원회 발표(2015년 기준)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한국 영화의 투자 수익률(상업영화 기준)은 평균 '마이너스 11%'다. 2008년엔 이 수익률이 '마이너스 43%'를 기록하기도 했다.
연초부터 극장가에 흥행 열풍을 일으킨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감독 신카이 마코토)도 대기업들이 등돌리던 대표적인 영화다. 대형 투자·배급사들이 하나같이 제작사와 감독의 전작 흥행 여부만 잣대로 삼아 의사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은.'을 수입한 미디어캐슬의 강상욱 이사가 수직계열화된 배급·투자사를 향해 "모든 감독의 '인생작'은 전작이 아닌 차기작"이라고 꼬집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양보해서 '비주류'로 불리는 영화들이 크라우드펀딩을 시도한다고 해보죠. 근데 관객(일반투자자) 수백 수천 명의 주머니에서 거대한 투자자금이 몰리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했어요. 도대체 이들은 어떤 투자지표로 의사결정을 내릴까 하고요. 정답은 제작·수입자에 대한 '신뢰'와 '평판'이었어요. 해당 영화의 제작사와 프로듀서, 감독과 스태프 등을 잘 알고 있거나 이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듣게 된 관객들이 '신뢰'라는 연결고리로 일종의 커뮤니티를 만들더라구요. 소액이지만 콘텐츠에 직접 투자해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으로 직접 홍보(바이럴 마케팅)에 나서고 있는 거에요. 재밌고 놀라운 충격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애초 금융자본의 투자집행자로서 일반 대중들이 영화에 던지는 반응, 즉 '집단지성'을 데이터로 수집해 가져오려고 시도했던 그가 여지껏 찾아 헤맨'롤모델'을 발견한 신(scene)이다.
"어엿한 신용평가서 한 장 없고 안정적인 이익을 내는 사업부도 없는 데서 회사채(채권)를 발행하는데 이 채권이 팔리고 있어요. 제작사와 수입사는 일정 정도 투자자에게 개런티(표면금리 등)를 주는 동시에 수익을 나누고, 추후에 이것이 신뢰와 평판으로 돌아와 또 다른 투자를 이끌어 내는 구조에요. 대작 상업영화의 경우 영역이 다르다고 인정하더라도 다양한 저예산 영화가 탄생할 수 있는 발판이 생겼다고 봅니다."
지금껏 큰 파도 없이 잔잔한 영화 투자업계의 지형이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되고 마케팅 중인 영화들은 일명 '대박(800만 관객 이상)' '중박(500~800만)'을 치려는 것이 아니라고 윤 이사는 지적했다. 이들은 예측 불가능한 콘텐츠의 성격을 이해하고 '소비의 다양성'에 베팅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눈길'은 2월3일에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했다. 오픈 30분 만에 목표금액(4000만원)을 달성했으며 사흘 뒤 펀딩 금액을 3억원으로 증액했어도 하루 만에 완판됐다. 이 영화는 3월1일(삼일절) 개봉 예정으로, 관객수 19만명을 넘으면 수익이 발생한다.
"'눈길' 등으로 보여준 커뮤니티의 힘이 바로 영화계에 불어온 크라우드펀딩의 진면목이죠. 소규모 영화 콘텐츠는 그간 메인 투자사, 투자전문가, 배급사만 쳐다 봐야 만들까 말까였죠.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마케팅 시장이 열린 겁니다. 제작자가 은행에 가서 빚내지 않아도 되고 1~2개월 걸려 수 십장의 서류를 작성해 마음 졸이며 투자기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제작자가 일반 대중에게 진심을 보여주고 이런 노력을 단 한 명만 알아봐 주어도 파이낸싱이 시작되는 것이죠."
인터뷰 막바지에 그는 '크라우드펀딩의 가치는 돈이 아니다. 그것은 커뮤니티다.(The Unique Value of Crowdfunding Is Not Money. It’s Community)'라고 한 에단 몰릭(Ethan Mollick)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경영학) 교수의 말을 인용해 크라우드펀딩의 힘을 재차 강조했다.
"'좋은 사람'과 '좋은 기업'과 '좋은 투자자'를 연결해 주는 것이 지금 제가 해야할 일입니다. 이 일을 잘 해내면 '좋은 금융투자' 시장이 자리 잡게 될 겁니다. 대형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를 기반으로 한 대기업의 수직계열화(투자·제작·배급)된 지금의 시장 구조는 다분히 불평등합니다. 크라우드펀딩으로 평등한 금융시장이 열릴지 모를 일이죠. 산업자본도 금융자본도 아닌 '신뢰자본'이 그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겁니다."
그가 와디즈로 일터를 옮기고 나서 받은 또 다른 충격은 '전문가'로 불리는 투자심사역들보다 더 뛰어난 '일반인'이 즐비하다는 사실이다. 펀딩을 진행 중이던 한 영화에 대한 일반인의 비판 댓글과 투자심사역이 작성한 보고서가 정확히 일치했다는 사실을 귓속말로 전해 들었다.
"영화 등 콘텐츠에 대한 투자로 이끄는 결정적인 요소는 창작자와 창작자를 둘러싼 커뮤니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것이 자금조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걸 계속 목격하고 있으니까요. 일반인들도 이렇게 재밌는 투자를 일상에서 함께 즐겼으면 좋겠어요. 영화 투자도 주식 투자와 같이 분산 투자가 가능합니다. 개인이 한 해에 최대 500만원, 개별 기업과 프로젝트당 200만원까지 투자할 수 있어요. 게다가 향후 펀딩을 감안해 여러 회사들이 연간 5% 정도 이율을 보장해 주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죠. 투자한 영화의 제작 과정을 항상 엿볼 수 있고 제작자와 댓글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해요."
정현영 한경닷컴 기자 j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