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서로의 새 연인으로…우리, 졸혼했어요"

입력 2017-02-09 17:37
졸혼 시대

스기야마 유미코 지음 / 장은주 옮김 / 더퀘스트 / 240쪽 / 1만5000원


[ 이미아 기자 ]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레바논의 세계적 문호 칼릴 지브란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읊었다. ‘사랑하다’와 ‘같이하다’가 결코 동일해질 수 없는 단어라는 차가운 현실을 그는 악기와 나무에 비유해 표현했다.

스기야마 유미코의 《졸혼 시대》는 이 시의 현실판을 보는 듯한 에세이다. ‘졸혼(卒婚)’은 말 그대로 ‘결혼에서 졸업한다’는 뜻이다. 부부가 행위의 주체지만 이혼과는 다르다. 이혼엔 ‘결혼의 파국’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졸혼은 그렇지 않다. “결혼의 이름으로 해 왔던 동거를 끝내고 따로 사는 것”을 말한다. 끝과 시작은 연결돼 있다. 졸혼에도 역시 처음과 중간, 끝, 그리고 또 다른 시작이란 나름의 단계가 있다. 이 과정에서 부부는 오래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보지 못한 서로의 매력과 장점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졸혼’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그러면서 가족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그는 “졸혼은 틀에 박힌 가정생활을 송두리째 뒤엎는 새로운 삶의 태도를 제시한다”며 “한 곳을 바라보며 하나로 움직였던 전체에서 각각의 개성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개인으로 방향을 바꾼다”고 설명한다. ‘쇼윈도 부부’로 상징되는 억지 웃음은 졸혼의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의 형태가 끊임없이 변하는 요즘, 저자가 말하는 졸혼은 남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 새롭게 사랑하며 인생의 진정한 파트너로 태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이 40대에 남편과 갈등을 겪다가 큰딸의 권유로 별거를 결심한 게 졸혼이란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 계기였음을 담담히 털어놓는다. “인연과 족쇄는 한 끗 차이였다”며 말이다. 아울러 그런 경험이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부부가 이미 실천하고 있는 생활 패턴이 돼가고 있음을 알게 되고, 여섯 쌍의 부부를 직접 인터뷰했다.

저자가 소개한 여섯 부부의 이야기는 내용은 각기 다르지만 결국 지향점은 하나로 이어진다. “나를 인생의 최고 순위에 놓아야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희생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억누르면 언젠가는 스스로와 주변의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파괴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부부는 다섯 자녀를 두고 졸혼을 택했다. 그 과정에서 아내는 숨겨져 있던 글쓰기 재능을 발견하고, 나중엔 정계에도 진출한다. 남편은 그런 아내와 따로 살면서 아내를 인격체로 존중한다. 또 다른 부부는 전업주부이던 부인이 요양복지사가 돼 새로운 인생을 살고, 남편은 산속 오두막에서 살며 각양각색의 물건을 만들며 지낸다. 대기업 회사원으로 근무하다 50대에 대학 교수가 된 남편, 그런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방식으로 남편의 이직을 지지한 아내의 얘기도 담겨 있다. 불신과 상처로 힘들어하다가 졸혼을 통해 ‘서로의 새 연인’으로 태어난 부부들의 사연도 있다.

저자는 “남들을 의식하지 않고 둘만의 부부 관계를 새로 만들고 싶다면 졸혼이 좋은 길잡이가 돼줄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울러 “졸혼이라는 개념을 빌려 자신과 배우자와 가족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라”고 강조한다. 떨어져 지내도 서로 든든하게 지지해주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부부가 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조언이다.

일본에서 2014년 출간된 이 책은 ‘졸혼 열풍’을 일으키며 큰 인기를 끌었다. 졸혼은 지난해 네이버에서 두 번째로 많이 검색될 정도로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단어로 떠올랐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