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아라 기자 ] "6~7년 전만 해도 학원 수강생들이 진짜 많았습니다. 방학 때는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학생들이 줄지어 드나들었어요. 요즘은 달라졌죠. '방학 특수'는 이제 옛말이 됐네요."
기업들의 '탈(脫)스펙' 바람이 어학원 풍경을 바꾸고 있다. 지난 3일 오전 토익(TOEIC) 학원을 비롯해 어학원들이 밀집한 강남역 인근을 찾았다. 주로 토익을 가르치던 어학원들이 영어 대신 중국어 강의를 개설하는 등 살 길을 모색하는 모습이 뚜렷이 감지됐다.
강남역 주변 A어학원 건물관리인은 한 강의실을 가리키며 "250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규모인데 수강생은 100명 남짓밖에 없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방학이 되면 강의실을 꽉꽉 채웠다고 했다. 이 건물에서만 18년간 일했다는 그의 말투에서 살짝 아쉬움이 묻어났다.
같은 시각 둘러본 인근 유명 B어학원도 한산한 모습이었다. 자습 중인 학생 2~3명만 눈에 띄었다. 유명세가 무색할 정도였다. B학원 건물관리인도 "학원 규모가 예전보다 줄어들었다. 주위에 학원들이 생기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고 전했다.
기업들이 학벌, 학점, 토익 성적 등의 스펙을 보지 않는 채용으로 바꾸는 추세에 타격을 받았다. 최근 삼성, 현대차, SK, LG 등 국내 대기업들은 일반 채용전형과 별도의 '스펙타파' 채용전형을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토익 1번지' 강남 어학원들마저 주춤하는 모양새다.
강남의 어학원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 토익 점수를 올리려는 수강생들이 몰리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기업의 채용 트렌드가 변하면서 토익 응시생이 줄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저출산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로 어려움을 겪던 학원들은 이중고를 맞았다.
실제로 토익 응시자는 지난 2011년 211만 명으로 고점을 찍은 후 2012년 208만 명, 2013년 207만 명 등 감소세로 돌아섰다. YBM한국토익위원회는 2014년부터 응시생 숫자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학원 앞 카페에서 만난 A어학원 수강생 김준 씨(강원대·26)는 "취업준비생들이 예전처럼 토익 준비에 목숨 거는 분위기는 아니다. 주변에서 토익 공부하는 학생은 나 혼자"라고 귀띔했다. 그는 "지원하는 회사에서 소지자에 한해 토익 성적을 제출하라고 해서 준비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요는 줄어드는데 공급은 오히려 늘어난 탓에 학원들은 '제 살 깎아먹기' 식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강남역 근처 대형 어학원의 경우 YBM·파고다·해커스어학원의 기존 3강 구도에서 2013년 '영단기'가 새로 시장에 진입하면서 각종 광고와 할인 혜택이 등장했다.
업계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연예인 모델이 늘어난 것도 이때쯤부터다. 영단기가 가수 성시경을 모델로 내세워 눈길을 끌자 이후 정준영·에일리(YBM) 등이 모델로 기용됐다. 세부 시장은 다르지만 '시원스쿨'의 유재석·류현진, 중국어 쪽의 전현무(문정아 중국어), 장위안(파고다) 등도 모델로 나섰다.
레스토랑, 카페 등 학원 제휴업체 할인은 기본이고 수강료 할인·환급, 경품 제공 등 각종 혜택이 주어졌다. 일찍 등록할수록 수강료 할인폭을 올리고 교재는 무료 배포하는 식이다. 한 어학원 관계자는 "최초 수강시 수강료를 30% 할인해주고, 친구 추천을 통해 최초 수강하면 문화상품권도 각각 한 장씩 증정한다"고 소개했다.
줄어든 토익 수요 대신 중국어, 일본어 등 강의 개설을 늘리면서 다른 살길을 모색하는 학원들도 많이 보였다. 강남역 대형 어학원들은 중국어를 전략 분야로 정하고 키우고 있다. 중국어 수요 급증이 힘을 보탰다.
실제로 이날 찾은 4개 대형 어학원은 모두 중국어 강의를 신규 또는 확대 개설했다. 학원가 인근 카페에서는 학생들이 "니하오(안녕하세요)" "짜이찌엔(또 뵙겠습니다)" 등등 큰 소리로 중국어 회화를 연습하는 소리도 들렸다.
"최근 2년간 전체 외국어 어학원 수가 30%나 줄었다"고 귀띔한 황성순 전국외국어교육협의회 회장은 "성인 영어시장이 정체기를 맞았다. 개별 학원들 상황도 대동소이하다"면서 "다만 전반적으로 증가세를 보이는 중국어 학습 수요에 대응하는 학원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풀이했다.
조아라 한경닷컴 기자 rrang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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