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가 주도해 정치교체, 국가통합을 이루려던 순수한 뜻을 접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1일 국회 정론관 긴급기자회견장에서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입에서 "접겠다"는 단어가 나오자 기자회견장은 술렁였다. 주위에 있던 참모진들조차도 대선 불출마 선언에 당황한 모습이었다.
기자회견장을 나오는 반 전 총장을 취재진이 에워쌌고 언제 그같은 결정을 내렸느냐는 질문에 ‘아침이다’라고 짧게 말했다.
반 전 총장은 마포 사무실 복귀후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여러분을 너무 허탈하게 만들고 실망시켜 드려 너무 미안한 마음이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 곰곰이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발표문을 만들었다. 중요한 결정을 하면서 여러분과 미리 상의하지 못해서 너무 미안하다. 아마 한 사람이라도 상의를 했다면 뜯어 말렸을 것이 분명하다. 한 발 더 디디면 헤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심경을 밝혔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반 전 총장이 여의도를 찾아 새누리당, 바른정당, 정의당 순으로 지도부를 예방하는 날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심상정 정의당 대표를 만나기 직전에서야 이도운 대변인에게 '기자회견을 준비해달라'고 했다.
결과론적으로 반 전 총장의 대선 불출마 선언 전 잇달아 만난 각 당 대표들은 ‘울고 싶은 사람 뺨때린 셈’이 됐다. 그의 의중은 알지도 못한 채 의미심장한 말들을 직격으로 날렸기 때문이다.
◇인명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나이 들면 낙상주의, 집에 있어야"
인명진 새누리당 비대위원장과 반기문 전 총장의 만남의 키워드는 한마디로 '낙상주의'였다.
인명진 위원장은 "사람들이 저를 가르켜 진보주의자, 보수주의자라고 했다가 중도보수라고 한다"며 "최근엔 제가 낙상주의로 바꿨다"고 말했다. 이어 "나이가 들면 특히 겨울에 미끄러워 여기저기 다니다 낙상하기가 아주 쉽다"며 "집에 가만히 있는게 좋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당시 반 전 총장은 인 위원장의 농담을 웃으며 넘겼다. 하지만 불출마 선언 다음날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회동에서 불쾌감을 느꼈던 부분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인 위원장이 수인사도 끝나기 전에 "보수냐 진보냐"를 물어 당황했다"며 "이런 이분법은 국민을 양 진영으로 나누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정병국 바른정당 대표 "당대 당 통합은 절대 안된다"
정병국 바른정당 대표 역시 '원칙'을 내세우며 반 전 총장을 압박했다.
정 대표는 반 전 총장과 만나 "우리 당에 들어와도 경선룰과 로드맵은 바뀌지 않고 똑같이 경선을 치러야 한다"며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날을 세웠다.
만남이 끝난 뒤 기자들과 오찬을 한 정 대표는 반 전 총장과의 만남이 사실상 최후통첩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전했다. 그는 "당대 당 통합은 없다"고 못을 박으며 "우리 룰대로 대선을 치르겠다"고 강조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 "꽃가마 대령하겠다는 사람 믿지 말라"
반 전 총장은 심상정 정의당 대표를 만나기 직전 보좌진에게 기자회견 준비를 시켰다. 반 전 총장의 불출마 의지가 확고해 졌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던 심 대표는 마음에 담아뒀던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심 대표는 예방 자리에서 "(반 전 총장의) 정치적 선택은 자유지만 아마 국민들도 저처럼 안타까움을 갖고 있을 것"이라며 "저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 생각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진 비공개 대화에서 심 대표는 반 전 총장에게 더욱 강한 어조의 조언을 남겼다. 심 대표는 "꽃가마 대령하겠다는 사람을 절대 믿지 마시라"며 "외람되지만 반 전 총장을 위한 꽃방석은 마련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총장님이 스스로 확신을 갖는 만큼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하자 반 전 총장은 “요즘 절감하고 있다”고 답했다.
심 대표와의 예방이 끝난 직후 반 전 총장은 국회 정론관으로 직행했다. 회견에서 그는 "일부 정치인들의 구태와 편협한 태도에 지극히 실망했고, 이들과 함께 길을 가는것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됐다"고 밝혔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캠프에서 정무를 담당했던 이상일 전 의원은 불출마 발표 다음날 “정치인들이 반 전 총장에게 모멸감을 주는 말들을 서슴없이 했다”고 비판했다.
이 전 의원은 "몇몇 유력하고 유명한 정치인의 말과 태도는 반 전 총장을 만났을 때와 밖에 나와 언론을 통해 얘기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면서 "그들의 계산은 자기를 뽐내고, 자기의 주가만을 올리는 데 있었다. 그들은 자기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반 전 총장의 체면을 깎아 내리고, 반 전 총장에게 모멸감을 주는 말들을 서슴없이 뱉었다"고 전했다.
인격살해에 가까운 가짜뉴스가 쏟아지는 정치판에 염증을 느끼던 반기문 전 총장은 불출마 선언문을 가슴에 품고 정치 지도자 3인을 만났다. 자신에게 혹독하리만큼 심한 발언을 쏟아내는 그들 앞에서 반 전 총장은 웃음 띤 표정을 한 번도 잃지 않았다. 꽃가마는 끝내 오지 않았지만 그는 역시 타고난 외교관이었다.
이미나 기자 help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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