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한국 최초 백화점으로 일본과 경쟁…무너진 조선 유통업에 변화를 심다

입력 2017-02-03 16:45
수정 2017-02-03 16:46
김정호 교수의 대한민국 기업가 이야기

(3) 박흥식 화신백화점 세운 혁신가


서울 종로2가 로터리에 상층부가 뻥 뚫린 특이한 건물, 종로타워가 서있다. 원래 이곳에는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박흥식은 일제 강점기에 화신백화점을 세운 사람이다. 그 시절 가장 혁신적 기업가가 박흥식이었다.



■ 기억해 주세요^^

박흥식은 16세 어린 나이에 쌀장사로 돈을 벌어 종이 장사를 시작해요. 스웨덴 종이를 수입하는 수완도 발휘했어요.

서울 종로2가 ‘종로타워’ 자리에서 출발

박흥식은 1903년 평안도의 용강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6세에, 쌀장사로 큰 돈을 벌었다. 1926년에는 그 돈으로 선일지물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종이 장사를 시작하게 된다. 철저히 신용을 지킨데다가 경품을 내거는 등 적극적 마케팅을 한 덕분에 사업은 번창했다. 그러나 곧 조선인이라는 한계에 부닥쳤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종이 공급은 일본인이 거의 독점했다. 특히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대규모 종이 수요자들에 대한 신문 용지 공급은 모두 일본인 종이상들이 맡고 있었다. 일본의 종이 제조업체들이 조선인에게는 신문 용지의 공급 자체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게 포기할 박흥식이 아니었다. 북유럽 국가들이 제지업의 강자임을 알아낸 박흥식은 스웨덴 대사관에 종이를 수입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낸다. 놀랍게도 스웨덴 대사는 박흥식에게 감사의 인사와 더불어 스웨덴 제지회사의 연락처를 보내왔다. 수입한 스웨덴 종이는 일본 것보다 품질과 가격이 모두 뛰어났다. 이윤을 붙였는데도 일본산 종이보다 훨씬 저렴했다. 조선의 모든 신문사는 물론이고 일본 본토의 지방 신문사들까지도 박흥식의 선일지물에서 종이를 조달해갔다. 1930년대 초에 이르러 박흥식은 동아시아 종이 업계의 거물이 되었다.

북촌에 새로운 바람···유통혁명

그 무렵 조선의 유통업계는 거친 변화를 맞고 있었다. 미츠코시, 조지아, 히라다 등 일본의 백화점들이 조선에 점포를 열었다. 문제는 조선인 소비자들이 이들 일본의 상점들로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무뚝뚝한 조선 상인들만 봐오던 조선인들은 친절하고 싹싹한 일본인 점원들에 매료당했다. 일본인 상점들이 모여 있는 남촌(명동과 충무로 일대)에 손님이 넘쳐날수록 북촌(종로와 인사동 일대)의 조선인 가게들은 개점 휴업 상태가 되어 갔다.

박흥식은 북촌에 백화점을 세워 조선인 상계의 자존심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출발부터 만만치가 않았다. 총독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은 것이다. 그는 기존의 화신상회와 동아백화점을 인수해서 화신백화점으로 합병함으로써 총독부의 방해를 넘어 섰다. 화신백화점의 경영은 혁신적이었다. 당시로서는 금기시 되던 여성, 그것도 대졸 여성을 판매원으로 내세웠고, 해외에서 직접 물품을 조달해서 제품 경쟁력을 높였다. 화신백화점은 일본인 백화점들을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화신연쇄점을 모집해서 전국에 350개의 가맹점을 두었다. 80년 전에 이미 프랜차이즈 사업을 성공시킨 것이다. 또 화신무역을 설립해서 만주와 중국, 태국 등과 수출 길을 열었다.

반민족행위자로 재판···무죄로 풀려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박흥식에게 불운이 닥치기 시작한다. 반민족행위자 1호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이던 1944년, 일본군의 군용기를 생산하기 위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세운 것이 결정적 죄목이었다. 첫 재판에서 무죄로 방면되었으나 그 후로도 그의 친일 혐의와 관련된 재판들이 몇 번 더 이어졌다.

친일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흥식의 사업은 계속되었다.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재건해서 홍콩 마카오 등과의 무역을 재개했다. 동양 최대 규모의 레이온(인조견) 공장을 건설했고 일본의 소니와 합작을 해서 화신소니 텔레비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는 젊은 시절의 성공이 되풀이되지는 않았다. 인조견 공장도, 화신소니도 실패로 끝났다.

1994년 박흥식은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의 손길이 남아 있는 유일한 곳은 서울 관악구의 광신고등학교, 1939년 재정난에서 구하기 위해 인수한 그 학교뿐이다. 그가 세운 기업은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박흥식이 암울하던 일제 강점기에 최고의 혁신 경영을 했던 조선인 기업가였다는 사실만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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