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Biz] 신영무 전 세종 대표 "유리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평판…변호사의 자산은 올바름"

입력 2017-01-24 17:26
로펌 창업자에게 듣는다

판사복 벗고 예일대 로스쿨행, '한국 1호' 증권법 박사 돼
1983년 세종 설립하며 미국식 '파트너십 로펌' 도입
2013년 고문직까지 내려놓고 사회공헌 활동 '제2의 인생'


[ 김병일 기자 ] 2013년 8월 세종을 떠났지만 그는 지금도 로펌 대표다. 바른사회운동연합 등 시민단체 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할 요량으로 그해 12월 후배와 법률사무소(신앤박)를 차렸는데 현재 변호사만 벌써 12명이다. 법무법인 세종 설립자 신영무 대표 이야기다.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몰렸다.

서울대 법대 63학번인 그는 법대 학보인 피데스에서 활동하던 학창 시절과 군법무관 시절, 유학 시절에 많은 법조계 선후배와 친분을 쌓았다. 이들은 대부분 훗날 대형 로펌을 일궜거나 법조계 및 정·관계 지도층 인사들이 돼 신 대표를 음으로 양으로 도왔다. 그는 “나는 참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지난 20일 서울 대치동 KT&G 빌딩 8층의 신앤박 법률사무소에서 신 대표를 만났다.

김영무 대표에게 자극받아 유학의 길로

신 대표는 “군법무관 시절 만난 김영무 변호사가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술회했다. 군법무관 월급으로 신혼살림을 꾸려가기가 벅차던 차에 법대 8년 선배인 김진억 변호사 사무실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1973년 초였다.

판사 출신인 김진억 변호사가 개업해 변호사로서도 성공했는데 법대 3년 선배인 김영무 변호사도 군법무관을 마치고 같은 사무실에서 방 하나를 빌려 막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던 참이었다. 김영무 변호사는 가끔씩 식사 자리에 불러 고시에 합격하자마자 바로 미국 시카고대와 하버드대 로스쿨로 유학 간 얘기며 베이커앤드맥킨지에서 일한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신 대표는 “두 선배의 영향으로 젊은 나이에 한 번 더 공부하고 오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판사로 임관해서도 유학 생각이 떠나지 않았는데 풀브라이트 장학재단의 장학금 지원 조건이 판사직을 접는 것이어서 미련 없이 2년 만인 1975년 3월에 법복을 벗었다.

증권법 1호 박사가 되다

예일대 로스쿨에서는 증권법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당시 한국 증권시장은 걸음마 단계였고, 대학에서도 증권법을 전공한 사람이 없었다. 증권법 관련 박사학위 논문을 써 한국의 증권법 1호 박사가 됐다. 이론에 덧붙여 실무를 익히기 위해 미국 연방증권거래위원회(SEC)에서 연수를 받았고, 뉴욕의 쿠데르 브러더스라는 로펌에 취직해 일본 및 한국 기업 관련 일도 했다.

1980년 10월 미국 유학 5년 만에 귀국하니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보내왔다. 국내 최초 국제 로펌인 김장리의 김흥한 대표, 김앤장의 김영무 대표도 합류를 제안했다. 결국 황주명 변호사(현 법무법인 충정 회장)에게로 갔는데 황 변호사가 김장리로 옮기면서 남산합동법률사무소, 세종합동법률사무소(1983년 3월)를 차례로 설립했다. 김두식·하죽봉·최승민 변호사가 창립 멤버였다.

미국식 파트너십 로펌

신 대표는 미국의 로펌들처럼 파트너십에 기반을 둔 로펌을 만들고 싶었다. 파트너십 제도가 성공하려면 투명한 회계와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이 중요하다. 1980년대 초기 한국 로펌들은 대부분 창업자 중심의 오너 경영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 대표는 “젊은 변호사들이 일정 기간 창업자 밑에서 일하다가 결국 사무실을 떠나 독자 개업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당시 현실이었다”고 설명했다. 세종은 연공과 성과를 50%씩 반영하는 배당 방식을 택하고, 지분에 따른 의결권도 보장했다. 파트너 간 배당수익의 차이도 1등과 꼴찌 간에 2.5배가 넘지 않도록 했다.

탄탄한 실력에 조직 체계가 잡히자 사건 수임도 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한국이 증권시장을 단계적으로 개방할 때 외국인 전용 수익증권 발행, 코리아펀드 판매, 해외 전환사채 발행 등 업무에서 세종이 맹활약했다. 1997년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 시절에는 기업의 줄도산으로 워크아웃, 구조조정과 인수합병(M&A) 분야 변호사들은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았다.

바른사회운동연합 창립

송무분야 전문 로펌 열린합동 법률사무소와 합병하는 과정에서 일부 젊은 변호사들이 나가 법무법인 지평을 설립하는 등 구성원들의 이탈이 잇따르자 신 대표는 정년을 2년 앞둔 2007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제2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익활동이다. 신 대표는 1992년 나라발전연구회를 설립하는 등 법조인의 사회공헌에 일찍부터 관심이 많았다. 2011년 대한변호사협회장을 맡은 것도 그런 일환이다. 2013년 8월 세종의 고문직까지 내려놓은 다음에는 본격 시민단체 활동에 뛰어들었다. ‘반부패 법치주의 확립’과 ‘교육개혁’을 목표로 2014년 4월 바른사회운동연합을 창립한 것이 대표적이다.

성장통을 앓고 있는 변호사업계에 대한 그의 해법은 뭘까. 평판은 유리그릇처럼 한 번 깨지면 회복하기 힘들다는 것이 신 대표의 지론이다. 그는 “변호사가 아무리 많아져도 고객 일을 내 일처럼 해주고 변호사 윤리를 철저히 지키면 살아갈 길이 생긴다”면서 “올바름이 자산이고 힘”이라고 강조했다. 또 “변호사라는 직업으로 큰돈을 벌려고 하면 곤란하다”면서 “공익활동 등 보람 있는 일을 많이 했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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