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유통속도, 미국의 절반 이하
5대 은행장, 집값 15% 폭락 경고
'인플레 타기팅'과 '감세정책' 필요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우리 경제의 혈액인 돈이 안 돈다는 말이 들린 지 꽤 오래됐다. 대표적 경제 활력 지표인 통화유통속도(일정 기간 한 단위의 통화가 사용된 횟수)를 보면 미국이 1.44배, 한국은 0.69배다. 양국의 경제연령은 각각 110년, 50년 안팎이다. 전형적인 경제 조로화 현상이다.
돈이 돌지 않으면서 두 가지 위기론에 시달려왔다. 하나는 우리 국민이 미래에 먹고살 ‘성장대안 부재론’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일본 등 선진국은 견제하고 중국 등 후발국은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는 ‘샌드위치 위기론’이다. 최근에는 주택시장을 중심으로 부는 ‘역(逆)핀볼 효과형 위기론’이 고개를 들고 있어 주목된다.
‘핀볼 효과’란 제임스 버크의 명저 이름으로 사소한 사건이나 물건 하나가 도미노처럼 연결되고 점점 증폭되면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뜻한다. 주택시장에 적용한다면 각각의 볼링 핀(집값 결정 요인)에 해당하는 경제성장과 유동성, 금리, 투자자 심리 등이 우호적으로 예상돼 집값이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역핀볼 효과’란 핀볼 효과의 정반대 상황이다. 경제 활력이 떨어짐에 따라 시중에 풀린 돈과 실물경제가 겉도는 ‘이분법(dichotomy)’ 현상이 심해지는 가운데 갈수록 성장률과 국민이 손에 쥐는 가처분소득이 떨어진다. 이 때문에 투자자 심리가 위축되고 주택 거래량이 줄어들면서 비관론이 확산되고 있다. 금리까지 오르면 곧바로 위기론으로 악화된다.
연초부터 각국 주택대출금리가 상승기조로 돌아서면서 ‘세계 주택시장 대붕괴’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상환능력을 고려치 않은 주택대출로 경기회복을 모색한 한국이 심하다. 국내 5대 은행장도 올해 집값이 15% 정도 폭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국 집값 폭락발 역핀볼 효과 위기론’의 실체다.
대내외 여건을 감안할 때 한국처럼 단기간에 회복되기 어려운 경제 활력을 끌어올리려면 유동성을 더 공급해야 한다. 이 때문에 ‘인플레 타기팅’ 상한선을 올려야 한다는 요구가 나올 수 있다. 미국도 미약한 경제 활력을 보완하기 위해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와 벤 버냉키 전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간 이 논쟁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인플레 타기팅이란 중앙은행이 목표인 물가를 관리하기 위해 설정한 억제선, 엄격히 따진다면 상한선을 두고 통화정책을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선은 낮게 설정하면 떨어지는 경제 활력을 보완하지 못하고 물가안정에만, 높게 설정하면 경제 활력을 보완하면서 성장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두 학자 간 논쟁의 핵심은 ‘화폐환상’에 대한 견해차다. 크루그먼은 인플레이션으로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 경제주체는 소비와 투자에 적극 나설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버냉키는 경제주체는 자신이 보유한 자산의 실질가치가 떨어지면 오히려 ‘디레버리지’에 치중해 경기가 침체될 수 있다고 반박한다.
인플레 타기팅은 단점도 많이 안고 있다. 무엇보다 어떤 물가지표를 지정 목표로 선택해야 할 것인가다. 선택된 물가지표에 따라 같은 상황을 놓고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발생하면 인플레 타기팅은 오히려 중앙은행의 경기 대처 능력을 떨어뜨린다.
최근처럼 경제 활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인플레 타기팅과 같은 수요 증대책보다 ‘레이거노믹스’와 같은 공급 중시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견해가 부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감세정책이 대표적이다. 법인세 소득세 인상을 추진하는 한국을 제외하고 대부분 국가도 감세정책을 모색하고 있다.
레이거노믹스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은 아서 래퍼(A B Laffer)다. 레이거노믹스의 본질은 정부가 미리 짜인 수요에 맞춰 경기를 부양하는 총수요 증대정책과 달리 경제주체에게 불확실한 미래에 확신을 갖게 하고 활력을 어떻게 높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 점이다.
우리는 외화유동성을 비교적 빨리 확보한 이후 잦은 정책 변경, 정부 또는 정책에 대한 신뢰 부족, 정경유착에 따른 각종 부정부패 등으로 시스템 위기 극복이 지연되는 과정에서 실물경기가 완전하게 회복되지 못하고 최근과 같은 국정혼란 사태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 국제금융시장의 일반적 평가다.
연초부터 주택경기가 급랭하면서 고개 드는 ‘역핀볼 효과 위기론’도 같은 맥락이다. 여건이 악화될 때마다 반복되는 고질적인 위기론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인플레 타기팅과 레이거노믹스를 아우르는 복합처방이 필요하다. 지연되는 시스템을 개선하는 과제도 시급하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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