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근미와 떠나는 문학여행] (49) 이문열의 '젊은날의 초상'

입력 2017-01-20 16:30
후회할거면 그렇게 살지 말고
그렇게 살거면 후회하지 마라 !


중편소설 3편에 담긴 아픈 젊음

10대와 20대 초반에 읽은 소설 가운데 많은 작품이 절판되거나 품절되었다. 수첩에 문장을 옮겨 틈틈이 들여다보던 『젊은날의 초상』은 반갑게도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1981년 11월에 1쇄를 찍은 이래 79쇄를 이어오고 있다.

『젊은날의 초상』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떠돌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하구」, 대학시절을 조명한 「우리 기쁜 젊은 날」, 대학을 중퇴하고 방황하는 젊음을 그린 「그해 겨울」이라는 세 편의 중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요즘 젊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춰 다시 읽었을 때, 청춘이라면 꼭 품어야 할 작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경험한 짧은 날과 경험하지 않은 많은 날을 지레 재단하며 아파하기보다 앞선 이들의 통찰에서 실마리를 찾는 게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입학한 지 1년도 못 돼 고등학교에서 쫓겨난 「하구」의 ‘나’는 가출해 깊은 수렁과도 같은 떠돌이 생활을 한다. 하지만 어둡고 낯선 길 위에서 피로를 슬픔 삼아 울다가 형에게 돌아온다. 「우리 기쁜 젊은 날」의 ‘나’는 친구 하가와 김형과 어울려 공허한 관념과 뿌리없는 사유에 의지하며 이상과 현실의 갈등 속을 오간다. 김형이 갑작스럽게 죽자 ‘더 확실하게 알기 위해, 더욱 큰 가치를 붙들기 위해, 미래의 더 큰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학교를 떠난다.

「그해 겨울」의 ‘나’는 2년 동안의 대학 생활이 가져온 피로와 혼란, 김형의 죽음으로 인한 허무와 절망의 분위기에 휩싸여 읊조린다. ‘마침내 삶이 내게 무언가 그 근원적인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까지 변했다. 이를테면 쓴 이 삶의 잔을 던져버릴 것이냐, 참고 마저 마실 것이냐 따위로.’

광부가 되거나 고깃배를 탈 작정으로 강원도에 갔다가 경북 산촌의 여관으로 흘러들어 허드렛일을 하게 된 나. 부도덕한 남자들과 일견 ‘유쾌하면서도 눈물겨운 여자들’을 지켜보다가 ‘너를 몰아낸 허무와 절망의 실체를 파악했는가. 결단에 조금이라도 접근했는가. 네가 안주하는 것은 회피나 유예에 불과하지 않은가’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곳을 떠나 바다로 향한다.

엄청난 눈을 헤치고 추위와 동상과 싸우며 창수령을 넘을 때 ‘아름다움은 모든 가치의 출발이며, 끝이었고, 모든 개념의 집체인 동시에 절대적 공허’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자각은 재를 벗어나기도 전에 절망으로 바뀌고 갑작스러운 피로에 휩싸인다. 가는 길에 고향 누나도 만나도 동네 사람들의 도움도 받으며 바다를 향한 여행은 계속된다. 무자비한 추위 속에서 친구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유서’를 완성해 품에 넣고 또다시 길을 재촉한다. 몇 차례 마주친 칼갈이 아저씨의 도움으로 길도 찾고 라면도 얻어먹는다.

갈매기는 날아야 하고 삶은 유지돼야 한다

결국 당도한 바다 앞에 말 없이 선 나. 왜 불렀는지 채근하듯 물가로 다가갔고 무릎까지 허벅지까지 물이 차도록 몽롱하게 바다를 본다. 순간 산더미 같은 파도에 갈매기가 휩쓸려 다시 떠오르지 못하는 것을 봤고, 그제야 바다의 포효가 무의미하고 공허한 움직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배신자를 처단하겠다던 칼갈이가 바다에 칼을 던지는 걸 본 나도 6개월간 간직하던 약병과 편지를 힘껏 던진다. 칼갈이의 무얼 던졌느냐는 물음에 “감상과 허영, 익기도 전에 병든 내 지식”이라고 답한다.

「그해 겨울」에서 내가 수첩에서 옮겨 적은 건 주인공이 바다 앞에서 읊조린 문구이다.

‘돌아가자. 이제 이 심각한 유희는 끝나도 좋을 때다. 바다 역시도 지금껏 우리를 현혹해 온 다른 모든 것들처럼 한 사기사(詐欺師)에 지나지 않는다. 신도 구원하기를 단념하고 떠나버린 우리를 그 어떤 것이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갈매기는 날아야 하고 삶은 유지돼야 한다. 갈매기가 날기를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갈매기가 아니고, 존재가 그 지속의 의지를 버렸을 때 그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삶을 재정비하고 싶은 이들과 먼 인생길을 단단히 다지고 싶은 이들에게 『젊은날의 초상』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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