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전문가 특별 기고] 조지 소로스 "위기에 처한 '열린 사회'…EU, 1990년 소련처럼 붕괴할 수 있다"

입력 2017-01-01 20:06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 회장

"성장 정체…난민통제력 상실
올 유럽 선거 끝나면 푸틴 영향력 더 커질 가능성"


[ 이상은 기자 ]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 나는 내 친구들에게 이런 인삿말을 보냈다. “지금은 평범한 때가 아니네. 이 문제 많은 세상에서, 자네의 건투를 비네.” 나는 이제 이 메시지를 세상의 다른 사람과도 나눠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그 전에 나는 내가 누구이고 내가 뭘 지지하는지를 설명해야겠다.

나는 여든여섯 살 먹은 헝가리 출신 유대인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 시민이 됐다. 어떤 정치체제가 지배하는가의 중요성을 어릴 때 배웠다. 히틀러의 독일이 1944년 헝가리를 점령했을 때 아버지는 상황이 심각한 것을 깨닫고 가족과 주변의 여러 유대인을 위해 가짜 신분증을 구해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때 죽었을 것이다. 그의 도움으로 대부분 살아남았다.

1947년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한 헝가리를 탈출해 영국으로 갔다. 런던정치경제대(LSE)에서 철학자 카를 포퍼에게 배웠다. 오류성과 재귀성 두 가지 기둥을 중심으로 나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나는 사람들이 지도자를 뽑고, 지도자는 유권자의 이익을 살피도록 요구받는 ‘열린 사회’와 통치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안을 조작하려 시도하는 ‘닫힌 사회’를 구별하게 됐다.

이는 지나치게 단순한 분류다. 잘 작동하는 모델에서 실패한 국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 다양한 종류의 사회가 역사적으로 존재했으며 상황에 따라 다양한 수준의 정부가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두 체제를 구별하는 것이 쓸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열린 사회의 적극적인 전파자, 그리고 닫힌 사회에 대한 반대자가 됐다.

◆닫힌 사회가 늘고 있다

지금은 역사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시기다. 열린 사회들은 위기에 처했다. 파시스트 독재자부터 마피아 국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닫힌 사회가 부상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선출된 지도자들은 유권자의 정당한 기대와 염원을 충족시키는 데 실패했고, 유권자는 현재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엘리트층에 민주주의를 뺏겼다고 느낀다.

소련이 무너진 후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의 원칙을 이행하기로 약속한 미국이 세계의 유일 슈퍼파워로 떠올랐다. 이후 세계화가 부(富)의 총량을 키울 것이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금융시장의 세계화가 급속히 진전됐다. 만약 (시장에서) 승리한 이들이 실패한 이들에게 보상을 해 줬다면 (현 체제는) 좀 더 갔을 지도 모른다. 이는 승자들이 패자에게 보상을 거의 해주지 않는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다.

하지만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기업을 믿는 이들이 승리했다. 나는 그들을 ‘시장 근본주의자’라고 부른다. 금융자본은 경제 성장에서 필수적인 요소고 개발도상국은 대개 자본이 부족하기 때문에, 세계화는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금융자본은 세금과 규제를 피해 자유로이 이동한다.

세계화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줬다. 가난한 나라들과 부유한 나라들을 경제적으로 통합했지만, 양쪽 내부의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선진국 진영에서 세계화의 혜택은 주로 금융자본의 대주주들에게 귀속됐다. 이들의 수는 전체 인구의 1%에도 미치지 않는다. 재분배 정책을 쓰지 않은 것은 불만이 늘어나고 민주주의 반대자가 확산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었다. 특히 유럽에서 그러했다.

◆EU, 자발적 연합체 성격 상실

나는 EU가 처음 구상될 때부터 이 제도를 열렬히 지지했다. 그것이 공동선을 위해서 자국 주권의 일부를 희생할 의향이 있는 민주 국가의 연합으로서, 열린 사회 구상을 실현하는 것이라 여겼다. EU는 포퍼가 ‘초기 단계의 사회 공학’이라고 부른 것을 과감하게 실험했다. EU의 지도자들은 실현 가능한 목표를 일정한 계획표에 따라 제시했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정치력을 동원했다. 이들은 하나하나의 행위가 다음 단계의 통합을 필요하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는 그렇게 EU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후 뭔가가 상당히 잘못됐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동등한 국가들의 자발적인 연합체’는 ‘채권자와 채무자 관계’로 변질됐다. 채무국은 지켜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고, 채권국은 채무국들이 억지로라도 의무를 다하게 하려 애쓴다. 이는 자발적인 관계도 아니고, 동등한 관계도 아니다.

독일은 유럽의 헤게모니를 쥐었지만 성공적인 패권국이 되려면 자국 이해관계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지키지 못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 후 마셜플랜을 시작해서 EU의 발전을 이끈 것과 대조적으로, 금융위기 이후 독일은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긴축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통일 전 독일은 유럽 통합을 가속화하려 노력했다. 통합에 저항하는 국가들을 설득하기 위해 언제나 돈을 좀 더 낼 의향을 보였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EU 예산과 관련해 독일의 추가 부담을 요구했을 당시 독일이 어떤 태도를 보였던가.

◆독일, 자국이익에 매몰돼

그러나 독일은 동·서독 화폐 가치를 1대 1로 통합하는 통일로 비싼 비용을 치렀다. 리먼브러더스가 무너졌을 때 독일은 추가 부담을 감당할 만큼 사정이 좋지 않다고 느꼈다. 유럽 재무장관들이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회사(SIFI)가 더 무너지면 안 된다고 하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자국 유권자를 의식해 ‘모든 국가는 자국 금융회사를 스스로 돌봐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EU 분열의 시작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EU와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은 점점 더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시작했다. 현재 상황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 규정된 것과 매우 다른데도 불구하고, 조약을 바꾸는 것은 훨씬 더 까다로워져서 사실상 모든 회원국의 비준을 받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상황에 맞지 않는 법조문들이 유로존의 발목을 잡았다. 꼭 필요한 개혁을 진행하려면, 허술한 구멍을 찾아내야만 하는 지경이 됐다.

EU 조직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유권자는 소외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반(反)EU 움직임이 부상했다. 지난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결정,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이탈리아 개헌 국민투표 부결 등으로 EU 해체 경향은 한층 탄력을 받았다.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다. 세계 민주주의를 이끄는 미국의 유권자마저도 사기꾼이자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이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트럼프는 당선 후 발언의 수위를 약간 낮추긴 했지만 그의 행동이나 조언자 그룹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그의 내각은 능력없는 극단주의자들과 은퇴한 장군들로 채워졌다.

◆美 민주주의, 트럼프 독재자化 막을 것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 것인가. 나는 민주주의가 회복력이 강하다는 점을 미국에서 증명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제4계급(언론)을 포함해 미국의 헌법과 기관들은 행정부의 과도한 권력에 충분히 맞설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따라서 이들은 트럼프가 실제 독재자로 거듭나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가까운 미래에 내부 진통에 시달릴 것이다. 타깃이 된 소수자들은 여기에 시달릴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자국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보호하고 촉진할 여력이 없게 될 것이다. 반대로, 트럼프는 세계의 독재자들과 더 많은 친밀감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독재자 중 상당수는 미국과 협력하게 될 것이며, 나머지는 방해받지 않고 그들의 권력을 강화할 것이다. 트럼프는 원칙을 지키기보다 거래하길 선호한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런 정책은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에 인기를 끌 것이다.

◆푸틴 방식, 열린 사회와 공존 못해

특히 EU의 운명이 우려스럽다. EU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영향력 아래 놓일 위험이 있다. 정부에 대한 그의 사고방식은 열린 사회와 공존할 수 없다.

푸틴은 자기 권력의 취약성을 알고 있다. 그의 체제는 천연자원을 뽑아낼 순 있지만 경제를 성장시키진 못한다. 그는 조지아 우크라이나 등에서 벌어진 ‘색깔 혁명’(장미혁명 오렌지혁명 등)으로 인해 긴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제했고, 이어 잘못된 정보와 거짓 뉴스를 퍼뜨려 민주주의를 뒤흔들었다. 푸틴이 트럼프가 선출되도록 도운 방식이다.

올해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에서 줄줄이 선거를 치르는 유럽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에선 유력 대선주자 두 명이 푸틴과 가깝다. 이들은 러시아에 유화책을 쓰려 한다. 이들 가운데 차기 대통령이 나온다면 푸틴이 유럽을 손아귀에 넣는 것은 기정사실화될 것이다.

문제는, 푸틴이 민주주의를 흔들기 위해 사용해 온 방식이 사실을 존중하거나 현실에 대해 균형잡힌 시각을 되찾는 것과 배치된다는 점이다. 나는 유럽의 지도자와 시민 등이 푸틴의 방식이 그들의 삶의 방식과 EU의 창설 가치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점을 깨닫기를 바란다.

경제 성장이 정체되고 난민위기에 대한 통제력을 잃으면서 EU의 붕괴는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대로라면 EU는 소비에트연방(옛 소련)이 1990년대 초 겪은 것과 비슷한 길을 갈 전망이다. EU가 달라지기 위해서라도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EU의 해체를 막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Project Syndicate

■ 조지 소로스 회장 약력

△193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
△1947년 영국으로 이주
△1952년 런던정치경제대 졸업
△1956년 미국으로 이주
△1970년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 설립
△1973년 퀀텀펀드 설립
△1992년 파운드화 투자로 성공
△1993년 열린사회재단(OSF) 설립

정리=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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