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기내 난동 사건, 승무원들만 탓할 수 있나

입력 2016-12-21 17:05
'손님은 왕이다' 문화가 낳은 참극



[ 안혜원 기자 ] 미국의 유명가수 리처드 막스가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알린 '대한항공 기내 난동 사건'이 화제다. 20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발 인천행 항공기에서 프레스티지석에 탑승한 30대 남성이 만취해 옆자리 승객과 여승무원 등에게 욕설, 폭력 행사 등의 행패를 부려 논란이 됐다.

이 사건을 처음 전한 리처드 막스는 "모든 승무원들이 허둥지둥했으며 이 난동객을 어떻게 제지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도 못했고 교육도 받지 않았다"고 비판해 또 다른 논란을 낳았다.

하지만 업계의 관점은 달랐다. 서비스업 직종인 승무원들은 '고객은 항상 옳다', '고객에 대한 무조건 인내' 등의 가치관을 강요받는다. 이들은 "'손님은 왕' 문화에서는 '진상 고객'이라 할지라도 강경 대응이 쉽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즉 이번 사건은 승무원 개인이 아닌 서비스업에 대한 인식과 제도의 문제가 크다는 지적이다.

◆ 테이저건 쐈다간 벌점만 받을 수 있다?

리처드 막스는 승무원들이 기내 난동에 대한 대응 조치를 숙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항공업계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21일 대한항공에 따르면 기내 난동 승객 발생 시 대응 조치(매뉴얼)는 3단계로 나뉜다. 1단계 안내 방송 등을 통한 설득 및 요청, 2단계 구두 경고나 경고장 발부, 3단계 강력 대응 순이다.

이날 사건 발생 후 해당 항공기 기장은 안내 방송을 통해 상황을 알렸고 사무장은 난동 승객에게 안전 위협 행위에 대해 구두 경고한 뒤 경고장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폭행 및 폭언 행위가 지속되자 사무장 주도로 포승줄을 이용한 결박 조치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부분 항공사들은 이와 비슷한 매뉴얼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국내 항공사의 경우 외국 항공사에 비해 3단계 강력 대응 조치를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리처드 막스가 올린 사진에서도 여성 승무원은 테이저건을 해당 승객에게 겨냥했지만 실제 사용하지는 않았다.

승무원들은 강력 대응을 어렵게 만드는 문화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내 항공사에서는 승무원에게 기내 치안 책임자보다는 서비스업 종사자 역할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대한항공 승무원 김모 씨는 "'고객은 왕'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비즈니스석, 프레스티지석 승객의 경우 더욱 그렇다"면서 "VIP 고객이 컴플레인(불만)을 제기하면 기업 이미지에 타격을 받는다는 인식이 있어 '일을 크게 만들지 말고 참자'고 생각하게 된다"고 전했다.

제도의 문제도 있다. 3단계 매뉴얼과 '컴플레인 레터' 제도 간의 충돌 문제가 대표적이다. 컴플레인 레터는 승객의 불만을 접수받는 제도다. 국내 항공사들은 매뉴얼 이행보다 컴플레인 제도를 우선시한 탓에 비상 상황시 승무원의 대응을 소극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승무원 김씨는 "강경 제압을 한 이후 해당 승객이나 주변 승객들에게 컴플레인 레터를 받을 수 있다"면서 "당시 상황은 고려되지 않고 인사고과에 반영된다. 승진에 영향을 주는 벌점 수준"이라고 귀띔했다.


◆ 진상 고객 미리 알아도 대처 어렵다

항공사들은 기내 난동 경력이 있는 승객을 감시대상 명단(블랙리스트)에 올려 관리한다. 그러나 항공기 탑승이나 예약에 실질적 제한을 두기는 어렵다.

이번 사건 피의자도 지난 9월에 유사한 기내 소란 행위로 논란을 빚은 적이 있었다. 승무원 박모 씨는 "해당 승객은 과거에도 같은 논란을 빚어 승무원들 사이에 도는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었다"고 말했다.

기내 난동 행위는 해당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들의 안전의 위협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 하지만 제동을 걸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조치가 미비해 난동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항공업계 한 관계자는 "기내 난동 사건의 경우 소액의 벌금형에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라며 "결국 대응 방침은 블랙리스트 명단을 보고 알아서 조심하는 게 전부"라고 말했다.

'라면상무', '바비킴 음주 난동' 등의 기내 난동 사건이 논란이 되면서 지난 1월부터 항공안전법이 보강돼 시행됐지만 여전히 처벌은 벌금형 수준에 그쳤다. 이번 사건처럼 기내 폭언 등 소란행위와 음주 약물 후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은 1000만원의 벌금형이 최대 수준이다. 이마저도 기존의 최대 500만원 수준에서 상향 조치된 것이다.

지나친 친절을 강요하는 '한국형 승무원' 문화가 진상 고객을 만든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 관계자는 "국내 항공사 승무원들은 승객의 웬만한 요구 사항은 들어주는 편"이라며 "기업 이미지를 위해 승객과의 충돌없이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좋은 평가를 받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최대한 친절을 베풀려는 승무원에게 일부 승객 중 과하거나 비상식적인 요구를 하는 경우가 있다. 결과적으로 과한 친절이 진상을 만드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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