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 소설가 >
얼마 전 큰 이름의 문학상을 연달아 받았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내 안에 문학적 소양 같은 것이 반짝반짝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겸손의 말이 아니라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백일장 같은 곳에 나가 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초등학교 시절대로 그랬고, 중고등학교 시절엔 중고등학교 시절대로 그랬다. 나는 언제나 그런 상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던 아주 평범한 소년이었다.
한 학년이 5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시골 초등학교 시절에도 나는 그들 가운데 특별히 빛나는 구석을 보여주지 못했다. 내 앞에는 늘 공부로도, 글짓기로도 앞선 친구들이 있었다. 시나 군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 나갈 학교 대표를 뽑는 교내 대회에서조차 나는 단 한 번도 1등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시골 초등학교의 작은 교내에서도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어쩌다 큰 대회에 나가서도 번번이 떨어지기만 하는 나를 믿어주는 한 선생님이 계셨다.
지금은 정년을 마친 지도 오래돼 사모님과 함께 고향에서 노후를 보내는 내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다. 나에게만 특별한 인상으로 남는 분이 아니라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4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친구들은 언제나 그 선생님 얘기를 한다. 오래전부터 초등학교 동창들을 두 달에 한 번씩 만나오고 있는데, 50명쯤의 졸업생 중 서울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열다섯 명 정도이며, 그중 열 명쯤이 서울 시내의 한 작은 음식점에서 정기적으로 만난다. 멀리서는 울산과 광주에서도 오고, 때로는 강릉의 친구들도 일부러 서울로 올라와 그 모임에 합류하기도 한다.
어디서 만나든 서로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은 다음 꼭 빠지지 않고 챙기는 것이 옛 시절 선생님에 대한 얘기다. 친구들끼리 그 선생님에 대해 서로 알고 있는 근황과 건강을 묻는 우리 마음속의 은사님이 계신 것이다.
교내 백일장에서는 물론 군 대회같이 큰 백일장에 나가서도 매번 떨어지는 내게 그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했다. 그때 군 대회에 나가 아무 상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온 다음이어서 어린 마음에도 나는 참으로 큰 낙담을 했었다. 그런 나를 학교 운동장 가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앉혀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기 서 있는 매화나무는 어떤 나무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란다. 그런 매화나무 중에서도 다른 가지보다 더 일찍 피는 꽃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다른 가지에서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는데 한 가지에서만 일찍 꽃이 피니 반갑고 보기도 좋지. 그렇지만 이제까지 살면서 선생님이 보기에 어느 나무든 남보다 먼저 핀 꽃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 제대로 된 열매를 맺는 꽃들은 늘 더 많은 준비를 하고 뒤에 피는 거란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몰랐다. 나에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저마다 방법이 달랐지만 우리 친구들 모두 그 선생님에게 그런 사연 하나씩 가지고 있다.
멀리 떨어져 살아 자주 찾아뵙지는 못해도 우리 마음 안에 그 선생님은 지금도 환하게 인생의 등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지난번 뵀을 때, 선생님은 훌륭한 제자들을 두고 있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하셨지만 정말 훌륭한 선생님을 마음속에 두고 있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한 해가 지나가는 계절, 늘 전화로만 안부를 드렸는데 해가 가기 전에 꼭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겠다.
이순원 <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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