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야 산다
김치정 < 노원평생학습관장 >
인간은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한 35억년 이후 가장 발달한 생명체로 진화의 첨단에 서 있다. 두뇌는 물론 우리 몸을 구성하는 각종 기관의 섬세함과 치밀함은 현대과학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인미답의 세계다. 생명은 놀라움과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진화란 생존과 번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실로 도전적인 과정이다. 생존과 번식이야말로 지구상 생물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명령이자 의무다.
그런데 우리가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의 도상에 있다면 질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질병은 생존과 번식의 장애물이 될 뿐이 아닌가. 만일 노련한 진화의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질병은 이미 극복했어야 하지 않는가.
《아파야 산다》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혈색증을 앓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혈색증의 원인과 대책을 알고 싶어 생물학자의 길을 걷는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진화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혈색증은 철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철분을 몸에 축적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혈색증의 원인이다.
백인의 적지 않은 수가 보유하고 있는 혈색증은 제대로 된 진화 과정이라면 삭제돼야 할 진화의 그림자다. 하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혈색증이 아직도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14세기 유럽을 강타해 인구 절반 가까이를 죽게 한 페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준 것은 철분이다. 철분은 동전의 양면처럼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모두 갖고 있다. 장기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지만 단기적으로 생명을 지킬 방안이 있다면 우리는 당장의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혈색증은 감염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에서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진화는 혈색증을 택했다.
당뇨병을 보자.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 당뇨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당뇨병도 진화의 과정에서 어떻게든지 도태돼야 할 대상이지 않은가. 하지만 당뇨병도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충분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빙하기 인간은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생존과 번식을 위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추운 날씨를 견뎌내는 방법이란 혈액의 농도를 높임으로써 어는 점을 낮추는 것이다. 이는 혈액의 농도를 높임으로써 가능했고 이는 다름 아닌 당뇨병 증상과 일맥상통한다. 당뇨병은 빙하기를 건너온 인간의 후예들에게 새겨진 선조의 흔적이다.
각종 질병은 인류가 지금까지 생존과 번식을 위해 벌인 사투의 상흔이자 훈장이다. 생명의 제1의 목적인 생존과 번식을 위해 수십억년 동안 벌여온 생명의 길은 실로 위대한 여정이자 앞으로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정표다. 책 제목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돼야 한다. 개체의 고통은 인류의 진화와 생존 차원에서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샤론 모알렘 지음, 김소영 옮김, 김영사, 310쪽, 1만3000원)
김치정 < 노원평생학습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