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관료사회] "누구를 위해 일한건가"…'영혼 없는 부역자' 낙인에 공무원이 아프다

입력 2016-11-21 18:40
엘리트 관료 '최순실 사건' 연루…세종관가 쇼크

"윗선 지시 거부하기 어려운데…" 고충 토로
"도덕성·책임감 부족했다" 자성의 목소리도


[ 오형주 기자 ]
‘최순실 국정개입 사건’과 관련해 검찰의 중간 수사 결과를 지켜본 공무원들의 심경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엘리트 경제관료의 ‘표상’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던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 선배 관료들까지 연루됐다는 소식에 정부세종청사는 말 그대로 ‘멘붕’(멘탈붕괴)이었다.

젊은 사무관과 서기관들 사이에선 ‘내가 이러려고 어려운 고시 보고 공무원 됐나’는 얘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멘붕’에 빠진 관가

상당수 공무원은 검찰 발표 직후 ‘도저히 못해먹겠다’ ‘뉴스 보는 것이 고통이다’ ‘차라리 사표를 쓰고 싶다’ 등 격앙된 반응을 쏟아냈다. 대통령이 최순실과 공범이라는 검찰 발표는 ‘최순실 사태’가 터진 뒤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뉴스보다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한 과장급 공무원은 “공무원은 국민을 위해 일한다지만, 사실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구현하는 임무를 부여받아 일하는 게 역할”이라며 “대통령이 국정 농단의 공범이라는 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해온 모든 일을 부정해야 할 수밖에 없어 참담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최순실 씨가 장·차관 인사까지 일부 개입했다는 정황까지 나오면서 공무원 조직 내 불신도 깊어지고 있다. 지난달 황교안 국무총리를 필두로 각 부처 장관이 동요 자제를 당부했지만 이제는 못 믿겠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경제부처 A사무관은 “장·차관들도 다 한통속이었던 것 아니냐는 의구심까지 제기될 정도”라고 말했다.

사회부처 B사무관은 “‘최순실 사업’에 관여한 어떤 간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미리 눈치채고 얼마 전 해외 파견 나갔다”고 했다.

◆“공무원도 피해자다”

공직 사회 일각에선 ‘우리도 피해자’라는 의식이 존재한다. 공무원이야말로 정권의 성공을 위해 기용된 기술자에 불과한데, 정권의 지시를 감히 거역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한 국장급 공무원은 “사무관 서기관 때야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이 강하지만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정권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항상 다음 자리를 고민해야 하는 고위공무원 입장에서 윗선의 지시를 거부하기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이 때문에 정권의 필요에 따라 공무원 사회를 휘두르는 것이 문제이지, 단순 지시를 따른 공무원을 지탄만 할 수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공무원은 “상부의 지시를 따르는 과정에서 본인의 사리사욕까지 챙겼다면 법적으로 처리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까지 국민정서에 밀려 단죄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너무 무기력했다” 자성

최순실 씨 등 비선 실세에 국정이 휘둘린 것에 대해 관료들 스스로의 도덕성과 책임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 전직 관료는 “과거 선배들은 상부에서 부당한 지시가 내려올 때에 대비해 사표를 윗옷 주머니에 넣고 일했다”며 “아무리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라고 해도 후배들이 너무 무기력했던 건 아닌지 아쉽다”고 쓴소리를 했다.

일부에선 ‘양심선언’도 나오고 있다. 베트남 호찌민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는 김재천 영사는 지난 14일 한 방송에 나와 최순실의 측근이 외교부 인사에도 개입한 정황을 폭로했다. 김 영사는 “이런 일을 겪으면서 침묵하면 앞으로 똑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며 “다른 공무원도 필요하다면 본인이 용기를 가지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며 공무원의 자성을 촉구했다.

정국이 혼란스러울수록 공무원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전직 장관을 지낸 한 대학 교수는 “정치적인 이유로 정권이 흔들리거나 대통령의 힘이 빠지는 집권 말기로 갈수록 결국 믿을 주체는 관료들밖에 없다”며 “관료들이 외풍에 흔들리지 말고 중심을 잡고 묵묵히 일해야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