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 사격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은철
美 실리콘밸리 빅데이터 업체 한국지사장으로 돌아와
"사격에 열정 사라지고 공부에 미련 남아
죽기 아니면 살기로 열심히 했다"
"나는 목표가 있어야 움직이는 사람
내 돈으로 소년소녀가장 돕는 스포츠 재단 만들고 싶어"
[ 박희진 기자 ] 점심시간이 가까이 온 서울 강남 삼성동에서 자동차들은 거북이처럼 움직였다. 거리는 이미 '넥타이 부대'가 점령한 상태였다.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들어간 초고층 빌딩에서 이은철 트레저데이터 한국지사장(50·사진)이 "이쪽에 차가 많이 막히죠"라며 맞았다. 깔끔한 회색 셔츠와 니트 차림의 그는 밖에서 본 사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8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일까. 그에게서 올림픽 사격 금메달리스트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총보다는 그의 앞에 놓인 애플의 노트북 '맥북'이 훨씬 더 잘어울렸다.
"'트레저데이터'가 한국에 진출한지 이제 1년이 좀 넘었어요. 고객 수는 만족하는데 매출로 따지면 아직 한참 목이 마릅니다."
트레저데이터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둔 빅데이터 솔루션 제공 업체다. 한국 남자 사격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그가 정보기술(IT) 시장에서도 가장 뜨거운 빅데이터 업계에 몸담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얘기를 조금만 나누다보면 '이은철과 IT의 만남'이 그리 갑작스러운 일은 아님은 알 수 있다. IT 업계에서 보낸 시간과 국가 대표로 지낸 시간도 이제 얼추 비슷해졌다.
미국 땅을 처음 밟은 건 1980년 부모님을 따라서였다. 중학생 이은철은 학교 컴퓨터실에서 개인용컴퓨터(PC)를 갖고 노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사격만큼 컴퓨터도 재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 텍사스 루스런대에선 망설임 없이 컴퓨터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나니 목표가 없어졌어요.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붓고 '번아웃'된 느낌이었어요. 원래 은퇴하고 나면 코치로 뛸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더이상 사격에 열정이 없는데 코치가 되면 뭐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때 가장 미련이 남았던 게 공부였어요."
그는 자신을 목표가 있어야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했다. 올림픽 금메달은 사격선수 이은철의 최종 목표였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끝으로 사격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그는 이듬해에 미국 실리콘밸리로 향했다. 대학 전공을 살리면서 공부도 더 하고 싶었다. 한때 사격 세계 최정상에 올랐던 그가 실리콘밸리 말단 사원으로 새 인생을 시작하는 데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세운 목표가 소년소녀가장들을 지원하는 장학회와 스포츠재단 설립이었요. 꼭 제가 번 돈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사실 당시 국가대표나 금메달리스트는 돈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명예였죠. 메달을 따면 연금이 나오긴 하지만 월급 자체는 높지 않았거든요. 금메달을 땄을 때 총 2억5000만원 정도를 받았는데 그 정도는 실리콘밸리 회사들의 기본 연봉 수준입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첫 직장은 모바일 소프트웨어 전문업체인 '윈드리버'였다. 필드앱(응용프로그램)엔지니어였던 그는 영업사원들과 함께 현장에 나가 고객들을 만나는 시간이 많았다.
"윈드리버에서 일을 시작한 건 괜찮은 선택이었습니다. 웬만한 상용 제품에 전부 들어가는 소프트웨어였기 때문에 말단 사원이었지만 정말 배운 게 많아요. 업계 초보자가 IT 전반을 공부할 수 있었던 최적의 회사였죠."
첫 직장에서 행복했던 기억은 길지 않았다. 닷컴버블이 붕괴되면서다 입사 1년 만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 분기마다 10%씩 직원이 잘려나갔다. 입사할 때 2000명이 넘었던 직원 수가 나올 때는 800명으로 쪼그라든 상태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의 심정으로 열심히 했거든요. 회사에서 잘리고 처음으로 제 선택을 후회했어요. '여기서 왜 사서 고생을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고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어요. 어쨌든 그 때부터 진정한 생존 경쟁이 시작됐죠."
해고는 독이 아닌 약이 됐다. 이직한 회사에서 2년 만에 회사 전체 매출의 30%를 혼자서 올릴 만큼 일이 잘 풀렸다.
"소프트웨어 업체 'IP 인퓨젼'에서 한국과 대만 시장을 맡으며 성과를 많이 냈죠. 그 때 실리콘밸리에 제 이름을 많이 알리게 됐어요. 트레저데이터에 들어온 것도 당시 경력과 성과를 인정 받은 덕이 큽니다."
IT 업계에서 경력이 쌓일 수록 '내 것을 만들어 팔아야 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2009년 통신 중계기 회사 '인텔라'를 세운 이유다. 인텔라는 기술력을 인정받아 퀄컴과 소프트뱅크벤처스 등으로부터 투자를 받기도 했다. 이후 사물인터넷(IoT) 센서로 분야를 넓혔는데 이후 사업이 생각처럼 흘러가지는 않았다.
"뭔가 잘 풀릴 때마다 시련이 찾아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겸손해질 수 밖에 없었어요. 올림픽도 5번 나갔는데 4번은 메달을 못땄어요. 힘든 순간들을 거치면서 깨달은 건 그래도 노력을 하고 있으면 기회는 다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인텔라를 일으키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지만 결국 지난해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오랫동안 열정을 쏟은 회사였던 만큼 지난 시간을 떠올리는 그의 표정엔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에겐 무언가를 공부하고 파헤치는 유전자가 있어보였다. 사격 역시 연구와 분석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한 발을 쏘더라도 바람의 방향, 반동의 흡수 정도 등을 치밀하게 분석해 방아쇠를 당긴다는 얘기였다.
"많은 스포츠가 그렇지만 특히 사격은 과학적인 접근이 중요합니다. 총을 쏠 때 일어나는 반동을 몸이 일정하게 흡수해야 안정적인 성적을 낼 수 있어요. 이건 단순히 몸으로 연습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바람도 잘 이용해야 해요. 바람 방향에 따라 총알의 흐름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오조준을 해야하죠."
트레저데이터 한국지사장을 맡으면서 빅데이터 분야를 집중적으로 파기 시작했다. 처음 6개월동안 시장 조사를 하면서 빅데이터에 대한 국내 논의가 공허하고 추상적이란 사실에 놀랐다고 했다.
"미국에선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부터 대기업까지 모두 빅데이터를 자유롭게 쓰고 있어요. 한국은 '빅데이터'라는 명칭의 함정에 빠져있어요. 논의는 많지만 정작 실무에서 활용도는 떨어지는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시스템이 아니라 '빅데이터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무엇이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이거든요. 빅데이터를 분석해 실무에서 바로 쓸 수 있는 팁을 제공하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죠."
빅데이터 업계에 와서 그는 또다른 목표를 만들었다. 국내 회사들이 빅데이터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단순히 사업을 운영하는 '감'이 아닌 빅데이터 기반 정보들로 '돈 버는 답'을 보여주겠다는 얘기다.
"인터넷 인프라가 잘 갖춰진 한국은 빅데이터 산업의 성장 잠재력이 큽니다. 그럼에도 개인정보 보호 등을 이유로 관련 규제가 심하고 데이터 공유 문화가 아직 자리잡지 않았다는 게 아쉬워요. 빅데이터 산업이 발달한 일본은 오래전부터 데이터를 모으고 공유하는 게 습관처럼 돼 있어요. 한국도 규제나 문화가 바뀌어 빅데이터 인프라를 잘 활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박희진 한경닷컴 기자 hotimpac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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