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실증'에 빠진 대한민국, "뒤통수 맞은 기분"…분노·무기력 확산

입력 2016-11-04 18:03
수정 2016-11-05 05:45
자수성가한 일식집 사장 "'자식에 공부하라' 말 못해"

'불신의 문화'급속 확산
법·규범 신뢰 송두리째 흔들, 극도의 혼돈 '아노미' 현실화


[ 마지혜/황정환 기자 ] 한 대기업 임원 A씨는 요즘 근무 중 멍하니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 한숨을 쉬는 일이 잦다. 연말을 맞아 정리해야 할 업무가 많지만 일이 도통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는 “‘대한민국호(號)’가 가라앉게 생겼다는 생각에 헛웃음만 나온다”고 했다.

‘최순실 쇼크’에 놀란 국민의 분노가 무기력증과 허무주의로 번지고 있다. ‘순실증’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열심히 살면 뭐하나’ 하는 자조가 낳은 우울증을 뜻한다.

4일 서울 삼성동의 한 일식집 사장 김모씨(57)는 “요즘 자식들한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못 하겠다”고 했다. 어릴 적 가난을 딛고 자수성가한 자영업자라는 김씨는 “젊은 사람들이 ‘헬조선’을 얘기하면 ‘한국이 왜 지옥이냐’고 나무랐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는 “최씨와 그 측근들이 권력을 등에 업고 갖은 이권을 О餠?의혹들을 접하다 보니 내가 신뢰하고 살아온 나라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고 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문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감조차 안 잡히다 보니 전 국민이 무기력에 빠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곽 교수는 “가난을 극복하고 잘살아 보겠다는 ‘생존 분노’가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듯 분노는 성취욕을 자극하는 긍정적 기능도 있다”면서도 “현재 국민을 휩쓴 분노는 그와 반대로 사람을 한없는 무기력에 빠뜨리는 ‘절망적 분노’”라고 했다.

이날 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 대한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댓글 중엔 “진심이 담긴 사과였다”는 긍정론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반응이 상당수였다.

직장인 김모씨(40)는 “본질적 해결책을 내놓지 않고 감성만 자극하려 했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네이버엔 이번 담화에 대해 “감성팔이가 반복됐다” “담화가 아니라 통보” “최순실의 비리를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고 책임 회피한 것”이라는 댓글이 수만명의 추천을 받았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대국민 담화 관련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자영업자 황모씨(58)는 “지난 대국민 사과 때도 기자들의 질문 하나 받지 않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며 “진정한 소통 노력 없이 감성만 자극해 남은 임기를 버티겠다는 것 아닌가”는 의견을 내놨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법과 제도, 규범에 대한 신뢰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며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극도의 혼돈을 뜻하는 ‘아노미’가 온 것”이라고 했다.

전 교수는 “‘나 하나쯤 노력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하는 냉소보다 ‘나 하나만이라도 일상 속 잘못된 것들을 바꿔나가겠다’는 생각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마지혜 / 황정환 기자 loo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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