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베를린 장벽…자유·통일의 절규 그래피티로 피었네

입력 2016-10-30 15:06
지하벙커와 그래피티로 본 베를린의 뒷모습



독일 명작 영화 중 하나가 빔 벤더스 감독이 연출한 ‘베를린 천사의 시(Wings of Desire)’다. 독일의 웹 드라마 전문 영화제인 ‘베를린 웹페스트(Webfest Berlin)’ 행사가 끝나고 베를린을 둘러봤다. 영화의 감동이 베를린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통일을 염원하는 그래피티,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조형물, 지하 벙커 등에서 베를린의 이면을 들여다봤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그래피티의 버팀목

베를린에서 시간이 된다면 자전거로 도시 관광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베를린은 교통이 편하지만 좀 넓게 퍼져 있다. 자전거는 베를린 구석구석과 현지인의 삶을 쉽게 만날 수 있게 도와준다. 베를린에 사는 친구 조엘을 만나서 함께 자전거를 탔다.

거리를 지날 때마다 사방에 보이는 것은 그래피티였다. 건축물 벽, 지하철, 교각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거대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가리킨다. 어떤 아파트는 건물 전체가 그래피티로 뒤덮여 있었다. 조엘은 그래피티를 가리켜 ‘자유를 표현한 예술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자유의 상징은 아직도 베를린 장벽에 남아있다. 그래피티는 원래 미국 뉴욕에서 시작됐지만 베를린까지 퍼졌다. 불법임에도 베를린이 그래피티의 메카가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동서가 나뉘어 있던 냉전시대, 서독 젊은 예술가들은 통합을 애타게 부르짖었다. 그 염원을 벽을 화폭 삼아 그래피티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권력에서 벗어나 벽을 만지며, 정치적인 이념을 베를린 장벽에 그렸다. 그런 표현들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동서가 통합되는 기적에 힘을 보탰다. 남북이 갈라져 있는 한국 현실을 생각하면 부러울 뿐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에도 그래피티 문화는 더 번져갔다. 벽, 지하철, 공공장소, 빌딩 등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지우는 데 필요한 예산도 엄청나게 든다고 한다. 베를린 외곽에 있는 아파트 건물은 곳곳이 개축 중이었다. 그래피티를 간직한 건물과 벽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그래피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 궁금했다. 조엘은 “새 건물들 위에 그래피티가 다시 그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를 마음껏 표현하려는 욕구가 존재하는 한 그래피티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래피티를 둘러싼 논란은 많다. 반달리즘(훼손행위)인지 예술인지도 논쟁거리다. 갑론을박 중에 거리 예술가들에게 좋은 공간이 생겼다. 옛날 공장을 개또漫?만든 예술가의 거리 ‘로 템플(Raw Temple)’이다. 합법적으로 아티스트들이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거리의 예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곳이다. 매년 그래피티 페스티벌을 여는데 이 시기가 되면 세계의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모여든다. 방문해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을 전체가 그래피티로 뒤덮여 있었다. 버거킹, 피자헛, 스타벅스를 비롯해 태권도 도장도 보였다. 낯선 땅에서 태권도장을 보니 왠지 모르게 뿌듯하다.

점심시간에는 조엘과 지역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강가에 붙어있는 카날 레스토랑(Freischwimmer)에서 맥주를 한 잔 마시니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공원에서 전쟁의 참상을 돌아보다

베를린 도심에서 남동쪽으로 약 5.7㎞ 떨어진 곳에 트렙타워 공원(treptower park)이 있다. 과거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있을 때 동독에 속하던 곳으로 시민의 휴식처이자 유명 록밴드의 야외공연이 열린 명소이기도 하다.

슈프레강 옆에 자리한 공원을 자전거로 달렸다. 광장에는 많지 않은 관광객이 사진을 찍고 있었고 명상이나 산책을 하는 시민도 보였다. 이 공원은 특히 러시아인에게 의미가 깊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5년 4~5월 벌어진 베를린 전투에서 8만여명의 소련군이 전사했는데 공원에는 약 5000명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공원 내에는 전몰자를 추모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형물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1949년 세워진 12m 높이의 소련 병사 동상이다. 나치를 상대로 싸우다가 전사한 소련 군인의 희생을 기리資?세워졌다. 병사는 한 손에 소녀를, 다른 한 손은 큰 칼을 들고 있으며 깨진 하켄크로이츠(갈고리 십자가 문양)을 밟고 서 있다. 동상의 주인공은 1945년 4월30일 베를린 전투 중 독일 소녀를 구한 소련 병사 니콜라이 마살로프다. 전쟁터를 헤매던 소녀가 엄마를 찾으며 우는 소리를 들은 마살로프가 지뢰 매설 지역을 뚫고 기어가 아이를 구했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동상을 제작했다. 이는 풍문에 불과하며 소련 정부가 선전용으로 이야기를 꾸몄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가 5명의 아이를 구해 보육원에 인계했다는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동상을 바라보던 백발의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캐나다에서 왔다는 백인 노인은 6·25전쟁 참전용사라고 했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자마자 대화의 장이 열렸다.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참전용사에게 이곳은 의미 있는 장소리라.

지하벙커에서 평화의 소중함을

지하철이 다니는 베를린 역에는 거대한 지하 벙커(Berliner Unterwelten e.V)가 있다. 베를린 지하 벙커 투어는 인기 관광 상품 중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하철역 공간을 활용해 만든 벙커는 통일 이후 핵전쟁 준비 대피시설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관광단지로 조성됐다.

지하 벙커는 베를린 북부의 게순트브루넨 역(gesundbrunnen station) 근처에 있다. 벙커는 역 아래 공간을 활용해 만들어졌다. 폭격이 있을 때 독일 주민들이 대피하던 공간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색다른 경험이 된다.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는 점은 아쉽다. 과거 냉전 시기에는 서베를린에 이와 비슷한 벙커가 수십개나 존재했다고 한다. 벙커 안에 대피한 시민들의 최대 숫자는 베를린 시민의 약 1%. 핵전쟁이 터졌을 때 1%에 속하는 행운아가 돼 생존한다면 그것이 행운일지 생각해봤다. 2주 동안 지급되는 배급 물품은 두루마리 화장지 1개, 그릇, 숟가락 등에 불과했다.

벙커 중앙에 있는 공간, 공기 순환기, 부엌, 침대, 물 저장고, 정화기, 화장실, 발전기 등을 돌아봤다. 인상 깊은 것은 내부의 거울이었는데 유리가 아니라 알루미늄 반사판이었다. 가이드는 유리를 깬 조각으로 자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공기순환기 필터의 수명은 2주 정도. 전기를 이용한 동력으로 움직이다가 끊기면 직접 손으로 돌려야 한다. 직접 돌려봤는데 얼마나 힘이 드는지 1분도 되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히틀러가 머문 벙커는 흔적뿐

수도 시설에서 정화된 물은 1명이 하루에 2.5L씩 사용할 때 40일 정도 버틸 수 있는 양이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물이 방사능에 오염되기 때문에 벙커에서 40m 아래의 지하수를 끌어다 반드시 정수해서 사용해야 한다.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가이드는 “전쟁 시 최고 피란처는 없다. 벙커에 숨는다고 안전할 수도 없다. 오히려 더 비참해질지 모른다”고 말했다. 벙커 바깥으로 나오면서 전쟁이 없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지 생각해봤다.

이곳에서 5㎞ 남쪽에는 히틀러가 마지막에 머문 벙커가 있다. 지금은 철거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건물 앞 주차장에 그 흔적을 알리는 표지판만 남아 있을 뿐. 관광객이 사진을 찍고 스쳐 지나가는 장소가 됐다. 별로 자랑할 것이 못 돼 독일인들이 벙커?보존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히틀러의 몰락을 다룬 영화 중 유명한 것은 2004년 제작된 ‘다운폴(Downfall)’이다. 영화는 큰 흥행을 거뒀는데 히틀러 역할을 맡은 브루노 간츠의 뛰어난 연기도 한몫했다. 영화에 다른 자막을 넣은 패러디 영상도 많은데 유튜브를 통해 볼 수 있다. 영화와 같이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강영만 영화감독·K웹페스트집행위원장 youngmankang@gmail.com

여행 정보

트렙타워 공원과 가까운 역(Treptower Park)은 열차 S8, S9, S41, S42, S85 노선과 연결된다. 베를린 지하 벙커 투어는 게준트브루넨 역 근처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살 수 있다. 그룹을 제외하고는 당일에만 티켓을 구매할 수 있는데 관광객이 많을 수 있으므로 일찍 가서 예약하는 것이 좋다. 시간별로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 투어로 나뉜다. berliner-unterwelte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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